▲ 이정호 기계연구원 전략연구실장 |
눈길을 끈 어느 테디즌(TEDizen)의 답변은 이랬다.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과학 갤러리'(Science Gallery)와 '예술 실험실' (Art Lab)이다.”
차이점을 따지기 전에 서로간의 벽을 더 허물어야 한다는 촌철살인의 답변이었다. 보이는 과학과 예술은 다르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과학은 세상의 현상을 설명하며, 객관적이고, 증명된다. 정확한 수치와 이성적 판단으로 결국에는 누구나 인정하게 된다. 반면 예술은 표현이기에 주관적이다. 누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있으며, 대부분 비논리적이다.
하나는 화성에서, 또 다른 하나는 금성에서 온 것 같지만, 잘 살펴보면 두 분야 모두 도발하고 질문하게 하는 힘을 근거해 우뚝 섰다. 고대 그리스어 '테크네(techne)'는 로마인들에 의해서 '아르스(ars)'로 불리다 유럽으로 넘어가면서 '아트(art)'로 칭해지는 언어적 변천 과정을 거쳐 오늘날 '기술'을 뜻하는 테크놀로지(technology)가 되었다. 문명의 초기, 자연에 대한 관찰과 인간에 대한 성찰에서 태어난 형제, 자매인 기술과 예술은 그 뿌리를 같이 하여 인류를 서게 한 두 다리이자 역사의 주춧돌이 됐다.
자연스레 과학기술과 예술의 만남, 모든 것이 어우러지는 융합과 창조의 물결이 대덕연구단지에도 휘몰아치고 있다.
한국기계연구원은 예술가가 원내에 거주하며 기계기술을 활용해 예술 활동을 하는 '아티언스 레지던시(Artience Residency) 프로그램'을 5월부터 본격 가동한다. 지난 16일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예술기관인 대전문화재단, 대전시립미술관, 대전문화예술의전당의 대표 및 관장이 참석한 가운데 4자 협약을 맺은 게 첫 시작이었다.
아티언스 레지던시는 대전문화재단이 지난해부터 추진해온 예술가와 과학자의 매칭 워크 프로젝트. 앞으로 두 작가는 한동안 연구원 기숙사에서 머물며 기계기술을 재료와 테마로 한 창작활동을 하고 연구진들과 교류하면서 창작에 필요한 다양한 영감과 아이디어를 얻게 된다. 이번 프로그램을 통해 제작된 작품은 연구원 원내에 상설 전시된다.
일선 연구진들에게도 새로운 바람이다. 원내에서 예술가들과 함께 공감하면서 창의력과 감성을 자극하는 흔치 않는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프로그램을 활용해 원내 문화예술 동호회 활동도 풍성해질 테다. 작가와 함께 이야기하다가, 혹은 때때로 창작 활동을 돕다가 다양한 연구개발 아이디어가 여기저기서 툭툭 튀어나올 수도 있다. 한국기계연구원이 정부출연연구기관 가운데 처음으로 예술과 과학의 만남을 공식 프로그램으로 끌고 나간 것은 살아남기 위해서다. 남보다 앞서기 위해서가 아니다. 섞이지 않으면 도태된다. 공학과 자연과학, 인문학, 예술 등이 섞여 새로운 관점의 과학기술 지평을 열지 못하면 더 이상의 1등 기술을 만들어낼 수 없다. 기술과 경제, 과학과 인문학, 문화·예술 등이 한 데 어우러지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시대에서는 한 우물에 머물러 있으면 넘어지고, 결국 사라진다.
글로벌 기업 P&G는 R&D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C&D 전략으로 사업 모델을 혁신했다. 앉아서 '연구 개발' 하는 게 아니라 외부와, 다른 것들과, 우리 것이 아닌 것들과 '소통 개발' 하자는 것이다.
과학기술의 최종결과물로 1등 기술을 규정짓는 지식 생산 시대는 이미 끝났다. 그 기술을 일궈내기까지, 연구 개발의 전 과정과 인간의 소통 과정을 함께 들여다보는 창조의 시대에는 예술의 상상력이 기계와 인간의 관계를 변혁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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