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난순 교열부장 |
그래서 지난해 5월 대흥동 옛 도지사 관사에서 먹은 점심은 남다른 즐거움으로 기억된다. 안희정 도지사가 여기자들을 초대해 방문한 도지사 관사는 오래된 나무들과 온갖 화초들이 수놓은, '비밀의 화원'을 연상케 했다. 그리고 5월의 눈부신 햇살과 싱그런 미풍, 정원위 식탁에 차려진 황홀한 음식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순간, 내 동공은 커지고 식탐의 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신선한 야채들, 진한 버섯수프, 빵과 케이크, 연기를 피우며 구워지는 고기들…. 여기자들에 둘러싸인 안 지사의 인품과 매너, 핸섬한 외모는 나에겐 안중에도 없었다.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으며 안 지사는 충남도정의 비전과 정치적인 견해, 삶의 철학 등에 대해 열변을 토했던 것 같다. 난 그사이 접시를 세 번이나 비우면서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이제는 나이를 웬만큼 먹어 줄어들 법도 하건만, 이놈의 식탐은 지칠 줄 모른다. 먹는 것을 대놓고 밝히는 것이 여자로선 부끄러운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먹는 것이 참 즐겁다. 이성보다 앞서는 식탐을 자제하기란 여간 고역이 아니다. 맛으로 희열을 느끼고 맛으로 살아가는 고통을 알고, 맛으로 쌓은 추억들은 또다른 맛으로 내 안에서 거듭 피어오를 것이다. 맛있는 것들을 탐하는 이유다.
동시통역사이자 작가였던 요네하라 마리 역시 튼튼한 위를 가진 '냠냠공주'였다고 한다. 스스로 먹기위해 사는 타입이라며 눈앞에 맛있는 음식이 어른거리면 사족을 못쓴다고 했다. 그녀의 먹성은 학창시절 에피소드에서도 드러난다. 삿포로에 사는 친구집을 방문했을때 친구어머니가 차려준 음식을 남기지 않고 족족 먹어치웠단다. 친구 부모는 “내 아들에게 맘이 있었다면 그렇게 먹어댈 리가 없다”고 놀라더란다.
왜 사람은 자꾸만 무엇인가 먹고싶어 할까. 그것은 허기를 달래기 위한 것인 동시에 어떤 욕망의 발로이기도 하다. 에피쿠로스는 음식을 통해 얻는 감각적 쾌락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봤다. 영화 '나인 하프 위크'에서는 여러 가지 음식들이 남녀의 성적 유희에 매력적인 도구로 사용된다. 젤리, 딸기, 우유 등을 미키 루크로부터 받아먹는 킴 베이싱어의 입과 음식들이 클로즈업되는 장면은 먹는 행위와 성적 욕망의 관계를 잘 말해준다.
우리가 먹는 음식과 먹는 방식은 개인적 정체성과 연결된다. 먹보들의 경우 단순히 먹는 것을 즐기거나 마음의 결핍이 원인이라고 한다. 마음의 결핍은 불안일 수도, 외로움일 수도 있다.
그럼 늘 '배고파!'를 외치는 나는 무엇인가. 나의 유년시절인 1970년대는 여전히 궁핍의 시대였다. 지금은 웰빙음식으로 각광받는 보리, 감자가 그때는 가난한 서민들의 상징이었다. 풍족하게 먹지 못한 아이들은 재미삼아 혹은 배가 고파 무성한 잎새 밑의 땅줄기에 매달린 아린 감자를 베어먹곤 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서민들의 배고픔을 면해주었던 감자. 감자는 제주도 말로 '지슬'이라고도 한다. 제주 4·3사건을 다룬 영화 '지슬'에서 감자는 누군가를 살리고 누군가를 죽이는 매개물이다. 감자는 비극의 씨앗이 되고, 이념의 희생양이 되는 사람들의 굶주린 배를 채워주기도 한다. 21세기 자본주의 시대에서 이념은 어쩌면 허무한 메아리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념에 의지해 살아간다.
봄꽃들이 앞다퉈 피고 있지만 지금 우리는 찬란한 봄을 찬미할 수 없는 상황이다. 북한의 벼랑끝 전술과 한·미의 강경한 대응은 위기지수를 높이고 있다. 한반도의 냉전상태는 언제 끝날 것인가. '수령님'이 천명했던 북한 주민들의 '쌀밥에 고깃국'은 요원한가. 생활고로 자살하는 남한의 서민들은 어찌할 것인가. 먹어야 살 수 있고 살아야 희망이 있는 것. 곧 무성한 감자 잎들이 들판을 파랗게 수놓을 것이다. '당신과 나의 뜨거운 감자', 이땅의 가련한 민초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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