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지호 고암 미술재단 대표 |
다행히도 생전 고암이 동·서양을 넘나들며 만든 예술적 성과는 우리의 눈과 정신, 감각의 세계에 남아 형형색색의 모양으로 구현돼 이어져 오고 있다.
얼마 전 열화당 이기웅 사장이 필자에게 건넨 당부가 잊히지 않는다.
“근현대미술의 거장 고암이 담길 그릇을 만드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느냐”는 말이었다.
최근 필자는 고암이 남긴 작품 가운데 일부인 533점의 기증작품으로 전시회를 준비하며 문뜩 느낀 기분이 있어 더욱 예민하게 받아들였다. 아마도 이번 작품전을 보는 관람객 역시 나와 같은 왠지 모를 기운을 감지하리라 예상한다. 바로 이런 느낌이 명화가 주는 감동이 아니냐는 생각도 한편으로 해본다.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담은 피카소의 1937년 작품 '게르니카'에서 당시 영문도 모르고 죽어간 마을 사람들의 울부짖음을 조형언어로 번역한 화가의 감정을 헤아리는 것이다.
필자는 지난달 공무출장으로 다녀온 프랑스 국립현대미술 수장고(FNAC, Fonds National d'Art Contem porain)와 프랑스 국립도서관(BnF, Biblioth eque Nationale de France)에 소장되어 있는 고암의 작품을 확인하는 과정에서도 같은 경험을 했다.
국립현대미술 수장고는 프랑스 정부에서 1977년에 설립하여, 미래의 문화유산을 구성하고, 프랑스 현대미술을 장려하며 공공 미술관의 전시는 물론 관공서나 대사관을 장식한다는 공공서비스 목적을 가지고 운영하고 있다.
'전시실 없는 미술관'이라고도 불리며 국제적인 미술동향을 대표하는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는데 고암의 콜라쥬 작품을 1973년에 사들여 소장하고 있다. 또 국립도서관은 루이 11세가 1480년에 창설한 왕실도서관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서관으로 꼽힌다.
특히, 판화 컬렉션 부서는 렘브란트와 마티스 등 세계적인 화가들의 작품만을 수집하는데, 이응노 화백의 판화 작품도 17점을 소장하고 있다.
17점의 작품 가운데 특히 '中心'이라는 서예로 그린 판화작품(1975년)이 눈에 띄었다. 작품을 보는 순간, 참혹한 현실에 맞서 예술가적 소신을 지키려는 고암의 간절한 심정이 담겼다는 느낌이 들어왔다. 고암의 작품은 두 공공기관을 비롯해 프랑스의 국립장식미술관과 파리 시립동양미술관, 몽펠리에 뷔르템부르크성 미술관(wurtemberg)에도 있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OMA), 덴마크 국립미술관, 이탈리아 로마 국립현대미술관, 스위스 라쇼드퐁 시립미술관, 영국의 브리스톨 미술관 외에도 일본, 대만과 같은 수많은 국가의 공공 기관과 개인들이 소장하고 있다.
이곳들 중에 뉴욕 현대미술관(The Museum of Modern art, MOMA)은 고흐와 피카소, 모네, 워홀 등 근현대미술의 거장들의 대표작들을 소장하고 있는 최고 수준의 미술관이다.
당대의 주요작품만을 소장하는 국공립미술관의 소장품에 고암의 작품이 대거 수장되었다는 것은 이미 고암이 세계미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백남준을 제외한 국내 어느 작가도 고암처럼 이렇게 선진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된 경우는 아직 없다. 더욱이 우리의 전통 미술을 기반으로 한 예술가로서는 최초이자 유일하다.
고암의 1204점의 작품이 소장된 대전 이응노 미술관은 한국 근현대미술사의 거장 고암 이응노 화백의 평생에 걸친 열정을 되새기고 이를 후세에 물려줄 수 있는 '미래적 가치'를 지닌 장소로 거듭나도록 노력하고 있다.
고암의 업적이 담길 그릇을 만드는 일은 마치 고암을 염하는 일과 같은 것이라는 열화당 이기웅 사장의 조언이 지침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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