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차준 대청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
로마시대 정의의 여신 유스티티아는 빈손으로 등장한다. 아마 로마법학자 울피아누스가 정의한 “각자에게 그의 것을”이라는 정의가 말로만으로도 잘 통하던 요순시대였나 보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인 15세기경이 되면 정의의 여신은 저울과 칼을 들고 등장한다. 아마 이때쯤 정의란 말로만 이루어지지 않을 정도로 이해관계가 얽히기 시작하여 이해득실을 저울에 달고 칼로 위협해야 승복하는 시대가 되었음이라. 16세기경이 되면 정의의 여신은 저울과 칼뿐 아니라 눈까지 가리고 나온다. 두 눈을 부릅뜨고도 가리기 어려운 정의를 어찌 눈을 가리고 판단한다는 말인가? 100년도 안되는 사이에 “유전 무죄, 무전 유죄”식의 청탁이 판치는 시대가 되었나 보다. 정의의 여신이 눈을 질끈 감고 공평무사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는 제스쳐를 취하고 있으니 말이다.
동양에서는 수평의 성질을 가진 물을 형평의 정신으로 원용하곤 한다. 그래서 물이 잘 흘러가게 만드는 것이 법(法)이고, 물길을 잘 이끄는 것이 치(治, 다스림)라고 생각했다. 물이 가득 담긴 큰 쟁반을 양쪽에 단 지게를 지고 물 한방울 흘리지 않고 걸어갈 수 있을까? 발이 편하면 신발을 잊고, 배가 편하면 허리띠를 잊듯이 형평이란 무엇인지 모르다가도 그것이 깨졌을 때 스스로 알게 되는 그 무엇이다.
각론으로 가자. 첫째, 차와 사람의 형평을 저울질해보자. 우리나라 자동차 문화는 왕으로부터 시작된다. 순종이 제1호 승용차를 탔고, 고관대작의 차가 그 뒤를 잇는다. 그러니 우리의 뇌리에는 대형차, 검은색이 부귀의 상징으로 각인된다. 그러다보니 도로의 문화도 차 중심이 되었고, 차는 주차장이나 골목길, 심지어 횡단보도에서도 상전행세를 하며 보행자들에게 빵빵거린다.
한때 유홍준 작가의 문화유산답사기 책을 끼고 마이카를 몰고 유적지를 답사하는 바람이 분 적이 있다. 그때 비포장 시골길을 만나면 “다른 지역은 다 포장되었는데, 우리 지역만 포장이 늦다”고 툴툴거렸다. 하지만 20여년이 지나 선진국의 문턱에 이르러 올레걷기 열풍이 불자 상황은 반전된다. 둘레 길을 걷다가 포장길을 만나면 “아니 돈이 남아 돌아가나? 이런 곳도 포장하게”하며 또 툴툴거린다.
이제 차 중심 문화에서 사람 중심 문화로 바뀌기를 바라는 사람이 늘고 있다. 결과제일주의의 빨리빨리 문화에서 행위주의의 느림의 문화에 대한 욕구가 증대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대전에서도 시대의 형평정신에 맞게 차도 중심의 교통행정에서 사람 중심의 인도(보도)에 관심을 보이는 행정을 펴보자. 단순히 보도 블록만 죽어라 교체할 것이 아니라 그런 예산을 아끼고 아껴 '시청-보라매공원-샘머리공원-정부 3청사-남문광장'으로 이어지는 신개념 보도(步道)를 새로 디자인해보자. 보라매공원 북쪽 도로와 정부3청사 남, 북 도로 각 50m 구간씩을 지하차도화하고 그 지상을 사람과 자전거가 다닐 수 있는 전용보도로 개설한다면 대전에는 시청에서 갑천으로 이어지는 친환경보도가 탄생하여 프랑스 샹젤리제 거리와 겨룰 수 있는 세계적인 명물거리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둘째, 교육에 있어서 '평준화 정책'의 형평성를 따져보자. 원래 교육은 수요자의 눈높이에 맞는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 고금의 철칙이기에 다양화, 다원화와 가까운 개념이다. 이에 따르면 공립교육은 평준화를 지향할 수 있겠으나, 사교육은 자율화해야 마땅하다. 이를 인위적으로 막으니 탈법이 판친다. 우선 학교간의 인적, 물적 인프라가 같지 않고, 더구나 학생의 능력과 자질이 천차만별인 상황인데, 같은 것을 전제로 평준화 운운하는 것은 눈가리고 아웅하는 짓이다. 고위관료 청문회에 위장전입문제가 자주 등장한다. 부동산투기도 있지만, 개중엔 좋은 학군에 입학하기 위한 경우도 있다. 그런데, 청문과정에서 뻔한 변명듣고 그대로 용인해주는 모습을 보다보면, 이는 돈 많고 잘나가는 사람처럼 탈법 행위를 해도 된다고 국민을 교육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위에서 지키지 못하는 법률을 아래에서만 지키라고 하는 것은 형평에 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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