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이]‘여우와 포도’ 킬링, 힐링 혹은 콜링의 이야기

  • 오피니언
  • 사외칼럼

[이승이]‘여우와 포도’ 킬링, 힐링 혹은 콜링의 이야기

[수요광장]이승이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 승인 2013-03-26 14:43
  • 신문게재 2013-03-27 21면
  • 이승이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이승이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 이승이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 이승이 목원대학교 국어교육과 교수
킬링(killing)의 시대다. 더불어 힐링(healing)과 콜링(calling)의 시대다. 한 편에서는 죽겠다고 아우성이고 다른 한 편에서는 치유가 필요하다고 아우성이다. 또 한 편에서는 소명의식이 필요하다고 아우성이다. 킬링과 힐링, 콜링이 뒤죽박죽 서식하며 피로가 쌓이고 있다. 점점 활기를 잃어가고 있다. 이런 때, 이솝우화가 번번이 떠오르는 건 왜 일까. ‘여우와 포도’ 이야기도 그 중 한 편이다. 배고픈 여우가 높이 매달린 포도송이를 끝내 손에 넣지 못하자 “익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저건 아주 신포도로군”하고 한 마디 내뱉고는 초연히 떠나버린 이야기. 어리석은 여우일까? 현명한 여우일까? 알쏭달쏭하다. 우리는 수시로 손이 닿지 않는 포도나무와 맞닥뜨린다. 포도를 따기 위해 죽어라 뛰어 올라야 하는 상황도 부지기수다. 과연 우리는 어떤 ‘여우와 포도’ 이야기를 쓰고 있는 중일까?

첫 번째는 영원한 패자가 된 여우 이야기다. 굶주린 여우는 높이 매달린 포도를 손에 넣을 수 없게 되자 심한 패배감을 느꼈다. 죽을힘을 다해 다시 손을 뻗어보지만, 소용이 없었다. 배는 고파오고, 타고 올라갈 사다리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여우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포도는 왜 저리 높이 매달려 있는 거야? 사다리는 왜 오늘따라 보이지 않는 거지?” 여우는 포도 탓 사다리 탓을 하며 넝쿨 아래서 한참을 씩씩거렸다. 마침내 여우는 죽어도 포도를 손에 넣을 수 없다는 ‘한번 패자는 영원한 패자’라는 뼈저린 아픔에 빠져들고 말았다. “아주 신포도로군” 여우는 절망했다. ‘포도는 처음부터 나 따위가 절대로 맛볼 수 없는 것이었어’ 여우는 기진맥진해 그 자리를 떠났다. 킬링 ‘기진맥진하게 만드는’, ‘말라죽게 하는’것을 선택한 ‘여우와 포도’ 이야기다.

두 번째는 나이롱환자가 된 여우 이야기다. 배고픈 여우는 넝쿨에 매달린 먹음직스런 포도송이를 봤다. 너무 높이 매달려 있어 힘껏 점프해 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손에 닿을 듯 말 듯 하면서도 손에 닿지 않았다. 여우는 실망스러웠다. 사다리를 찾아보았지만 그마저 없자 점점 난감해졌다. 여우는 속으로 생각했다. ‘속상해 죽겠네. 정말 먹고 싶은데, 그냥 갈 수도 없고…. 어쩌지?’ 고픈 배를 움켜잡고 넝쿨 아래서 한참을 힘없이 주저앉아 있던 여우는 포도송이를 올려다봤다. 포도는 풍선처럼 점점 하늘 높이 올라가 정말로 손에 닿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아주 신포도로군” 여우는 속으로 자신을 설득하고 달랬다. ‘저 포도는 익지 않아서 시금털털할 거야. 맛도 없고 먹어도 배부르지도 않을 테니 힘들게 딸 필요 없어. 게다가 난 지금 다리가 너무 아파서 높이 점프할 수도 없는걸.’ 여우는 자기 합리화를 통해 불편했던 마음을 치유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힐링‘치유’를 선택한 ‘여우와 포도’ 이야기다.

세 번째는 거짓 사도가 된 여우 이야기다. 어느 날 여우는 길을 가다가 높은 넝쿨받침 위로 정연히 매달린 포도송이를 봤다. 며칠을 굶은 터라 포도가 너무 먹고 싶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거듭 뛰어 올라보지만 손끝은 포도에서 점점 멀어졌다. 산 너머 해는 지고, 사다리는 없고, 힘은 빠졌다. 그 때 어디선가 어슴푸레 음성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여우는 ‘신의 부르심’으로 확신하고, 포도로 허기를 채우려 했던 마음을 단숨에 단념해 버렸다. ‘포도가 높이 달려 있는 것도, 사다리가 없는 것도, 때마침 해가 지는 것도, 그리고 내 힘이 빠진 것도 모두 신의 뜻일 거야’ 여우는 금세 포도를 먹을 수 없는 음식이라고 단정했다. 그후 포도송이를 올려다봐도 조금도 마음이 조급하지 않았다. “아주 신포도로군” 여우는 의기양양하게 말하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포도는 신이 내게 주신 음식이 아니야. 나는 성심을 다해 신이 내게 주신 음식을 찾아야 해. 그것만이 유일한 축복이야.’ 여우는 거짓 소명의식을 갖고 신이 주신 음식을 찾아 그 자리를 떠났다. 콜링‘소명의식’, ‘천직’, ‘직업’을 선택한 ‘여우와 포도’이야기다.

지금 우리는 어떤 ‘여우와 포도’ 이야기를 쓰고 있는 중일까? 이제는 제대로 된 이야기가 필요하다. ‘피로사회’등의 저자인 한병철 교수는 우리 사회에 필요한 건 “달콤한 힐링이 아니라 킬링”이라고 말한다. 진정한 킬링, 힐링, 콜링이란 불만으로 인한 절망, 자기 합리화로 찾은 치유, 거짓 소명의식이 아니다. 변화는 마음에 흡족하도록 정성을 다해 분노하고 죽살이쳐 바꾸려고 노력하는 데서 시작된다. 자신이 처한 불합리와 괴로움에 적극적으로 분노할 줄 알고 그 원인을 찾아 바꾸려는 노력이야말로 우리가 지금부터 써 나갈 ‘여우와 포도’ 이야기인 것이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현장]3층 높이 쓰레기더미 주택 대청소…일부만 치웠는데 21톤 쏟아져
  2. 대전서 금강 수자원 공청회, 지천댐 맞물려 고성·갈등 '얼룩'
  3. 차세대 스마트 교통안전 플랫폼 전문기업, '(주)퀀텀게이트' 주목
  4. 전국 아파트 값 하락 전환… 충청권 하락 폭 더 커져
  5. 대전시, 12월부터 배출가스 5등급 차량 운행 제한
  1. 롯데백화점 대전점, ‘퍼피 해피니스’ 팝업스토어 진행
  2. 더젠병원, 한빛고 야구부에 100만 원 장학금 전달
  3. 한화이글스, 라이언 와이스 재계약 체결
  4. 유등노인복지관, 후원자.자원봉사자의 날
  5. 생명종합사회복지관, 마을축제 '세대공감 뉴-트로 축제' 개최

헤드라인 뉴스


영정그림 속 미소 띤 환이… “같은 슬픔 반복되지 않길”

영정그림 속 미소 띤 환이… “같은 슬픔 반복되지 않길”

"환이야, 많이 아팠지. 네가 떠나는 금요일, 마침 우리를 만나고서 작별했지. 이별이 헛되지 않게 최선을 다해 노력할게. -환이를 사랑하는 선생님들이" 21일 대전 서구 괴곡동 대전시립 추모공원에 작별의 편지를 읽는 낮은 목소리가 말 없는 무덤을 맴돌았다. 시립묘지 안에 정성스럽게 키운 향나무 아래에 방임과 학대 속에 고통을 겪은 '환이(가명)'는 그렇게 안장됐다. 2022년 11월 친모의 학대로 의식을 잃은 채 구조된 환이는 충남대병원 소아 중환자실에서 24개월을 치료에 응했고, 외롭지 않았다. 간호사와 의사 선생님이 24시간 환..

대전서 금강 수자원 공청회, 지천댐 맞물려 고성·갈등 `얼룩`
대전서 금강 수자원 공청회, 지천댐 맞물려 고성·갈등 '얼룩'

22일 대전에서 열린 환경부의 금강권역 하천유역 수자원관리계획 공청회가 환경단체와 청양 주민들의 강한 반발 속에 개최 2시간 만에 종료됐다. 환경부는 이날 오후 2시부터 대전컨벤션센터(DCC)에서 공청회를 개최했다. 환경단체와 청양 지천댐을 반대하는 시민들은 공청회 개최 전부터 단상에 가까운 앞좌석에 앉아 '꼼수로 신규댐 건설을 획책하는 졸속 공청회 반대한다' 등의 피켓 시위를 벌였다. 이에 경찰은 경찰력을 투입해 공청회와 토론이 진행될 단상 앞을 지켰다. 서해엽 환경부 수자원개발과장 "정상적인 공청회 진행을 위해 정숙해달라"며 마..

[尹정부 반환점 리포트] ⑪ 충북 현안 핵심사업 미온적
[尹정부 반환점 리포트] ⑪ 충북 현안 핵심사업 미온적

충북은 청주권을 비롯해 각 지역별로 주민 숙원사업이 널려있다. 모두 시·군 예산으로 해결하기에 어려운 현안들이어서 중앙정부 차원의 지원이 절실한 사업들이다. 이런 가운데 국토균형발전에 대한 기대가 크다. 윤 정부의 임기 반환점을 돈 상황에서 충북에 어떤 변화가 있을 지도 관심사다. 윤석열 정부의 지난해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발표한 충북지역 공약은 7대 공약 15대 정책과제 57개 세부과제다. 구체적으로 청주도심 통과 충청권 광역철도 건설, 중부권 동서횡단철도 구축, 방사광 가속기 산업 클러스터 구축 등 방사광 가속기 산업 클러스터 조..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롯데백화점 대전점, ‘퍼피 해피니스’ 팝업스토어 진행 롯데백화점 대전점, ‘퍼피 해피니스’ 팝업스토어 진행

  •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