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승국 대전시 종무문화재과장 |
조선 후기의 대유학자인 송준길(宋浚吉)의 호이자 당호(堂號)인 이 동춘당(同春堂)에서 360여 년 전에 유학자들의 한 모임이 있었다. 그때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동춘당에 이르자 우암과 동춘당이 당에 오르는 순서를 서로 양보하다가 마침내 동춘당은 앞문으로 우암은 뒤로 돌아 뒷문으로 들어가서 자리에 앉았다는 일화가 전하고 있다.
아마도 항렬(行列)로나 나이로는 동춘당이 위이나 벼슬이나 사회적 명망으로는 우암이 지위가 높아서 그랬던 모양이다. 이것은 예학에 밝았던 두 학자의 면모를 잘 살필 수 있는 이야기가 된다.
누구나 익히 알고 있다시피 동춘당과 우암은 조선후기 기호유학(畿湖儒學)을 대표적인 학자다. 따라서 두 분만큼 각 분야에 걸쳐 당시 사회에 영향을 끼친 사람은 드물 것이다. 특히 우암은 조선왕조실록에 3천 번이나 언급될 만큼 조선조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것이다.
사실 17세기 이후 한국의 정치사·유학사의 중심이자 충절과 절의정신을 최대 지표로 삼은 기호유학은 이들 두 분에 의해 주도되어 영남유학과 더불어 한국유학의 양대 산맥을 형성해 왔던 것이다.
이 중 영남유학파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중심으로 한 주리론(主理論)이라는 학설로 이어졌다면 기호유학파는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중심으로 한 주기론(主氣論)이라는 학설로 이어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호학파의 학맥은 율곡에서 비롯되어 사계(沙溪) 김장생(長生)·신독재(愼獨齋) 김집(集)ㆍ동춘당 송준길ㆍ우암 송시열 등으로 이어졌고 을사늑약에 통분하여 순절한 연제(淵齋) 송병선(宋秉璿)·심석재(心石齋) 송병순(宋秉洵)으로 그 맥을 면면히 이어왔다. 동춘당과 우암의 후학양성을 한 강학처(講學處)가 우리 지역이고 동춘당·남간정사·송자고택 등 그들의 유적이 대전지역을 대표하는 문화재이듯이 우리 지역이 기호유학의 중심지임은 물론 공교롭게도 공간적 지리적으로도 국토의 중심지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남권에 비해 우리의 현실은 너무나 초라하다. 영남문화유교원은 세계문화유교문화특구로 지정하여 국학진흥원 설립 및 관련 유적ㆍ복원 등에 수조원대의 국가적 지원에 힘입어 학문적 연구는 물론 문화유산 활용에까지 확대되어 관광인프라 구축과 확대 등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반면 이에 버금가는 기호유학 연구와 지원 그리고 문화권 개발 현실은 어떠한가?
조선조 학자들의 문집 중 가장 많은 분량이라는 우암의 『송자대전(宋子大全)』은 일부만 번역 돼 있을 뿐 전체 번역은 되어 있지 않고 지금껏 기초 연구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은 이를 반증하는 것이다.
이에 내륙 첨단산업의 인문적 가치를 제고하고 세종시의 배후 문화권 도시로 성장 발전하기 위해서는 기호 유학의 연구를 수행하고 지원하는 연구기관은 물론이요, 체험, 전시 공간인 기호유교문화센터, 역사 문화단지 조성 등 보다 광범위한 정부 지원이 필요한 시점이다. 유학은 우리에게 너무나 멀고 어렵고 오래된 학문이라는 선입견을 떨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현대사회에서 날로 실추되어 가고 있는 도덕과 윤리를 유교사상의 핵심인 인문정신과 인간존중의 전통적, 정신적 가치로 온고지신(溫故知新)으로 삼아 계승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호유학의 문화유산만이라도 알뜰히 가꾸는 것이 기호유학의 진정한 발전적 계승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기호문화권 개발논의가 활발한 요즈음 우리가 기호유학을 이끌어갈 책무를 일찌감치 맡고 있었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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