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영 한국폴리텍대학 충주캠퍼스 학장 |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죽음을 목전에 두고 서대문형무소 지하 독방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작성했다는 유서를 접하고 열사의 마지막 모습을 상상하며 눈시울이 뜨거워지다 못해 통곡하는 심정이다.
유관순 열사는 1902년 12월 16일(일설에는 11월 17일) 우리 고장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에서 부친 유중권과 모친 이소제의 3남 2녀중 둘째 딸로 태어나 공주 영명학교에서 2년간 수학하다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편입해 서울에서 3ㆍ1운동을 맞이하게 된다.
3ㆍ1운동이 일어나자 학우 6명과 기숙사를 빠져나와 탑골공원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하셨고 연이어 3월 5일 남대문역 광장(현 서울역)에서 벌어진 학생 시위에 참여했다. 그 후 휴교상태로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오는 열차안에서 학우들에게 기차소리가 어떻게 들리냐고 묻자 친구들이 '칙칙폭폭'이라고 하자, 유 열사는 '대한독립 만세' 소리로 들린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독립에 대한 염원이 남다른 분이셨다고 한다.
3월 8일 고향으로 돌아오신 유 열사는 9일 주일밤 예배후 서울에서 일어난 3ㆍ1독립만세운동 상황을 상세히 설명하고 주도적으로 만세운동을 준비해 왔다.
아우내(병천) 장날인 4월 1일(음력 3월 1일)을 기해 일어난 3000여명의 만세운동을 이끄시다 일본 헌병대의 발포로 부친과 모친 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43명이 부상당했으며 유 열사께서는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모진 고문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셨다.
1920년 3월 1일 3ㆍ1운동 1주년 옥중 만세운동을 주도해 머리가죽이 벗겨지고 손톱과 발톱이 모두 뽑혀나갔으며 코와 귀가 잘려나가는 모진 고문을 당하시다 그해 10월 12일 18세 꽃다운 나이로 옥중 순국하셨다.
시신은 이화학당 '프라이' 교장의 요구로 인도돼 10월 14일 정동교회 김종우 목사의 집례로 영결식이 거행되었으며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으나 훗날 도로개발 등으로 유해조차 유실되었다고 하니 후손의 한 사람으로 부끄럽고 죄책감마저 든다.
유관순 열사는 14세기 영국의 침공으로 촉발된 영-불간 백년전쟁에서 위기의 조국을 구한 프랑스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성녀 '잔다르크' (1412~1431)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반만년 역사속에 찾아볼 수 없는 유일무이한 분이심에도 후손들의 역사적 평가와 대우가 너무 옹색한 것 아닌가 생각되어 늘 마음이 아프고 죄송스럽기만 하다.
당시 3ㆍ1운동 이후 전국을 휩쓸었던 독립운동에 대한 일제의 자료를 살펴보면, 횟수 1542회, 참가인원 202만 3089명,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만 5961명, 피검자 5만 2770명에 달한다.
시설은 교회 47곳 전소, 학교 2곳 전소, 민가 715채 전소 등으로 가히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규모의 민족운동이었고 광복을 맞이하기 까지 본격적인 독립운동의 출발점이자 모태였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이 후 유구한 세월이 흘러 대한민국 건국이래 최초의 여성대통령 시대를 맞아 거행된 3ㆍ1절 기념행사가 어느 해와 달리 새로운 느낌이 드는 것은 우리나라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희생이 누구보다 남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때문에 3ㆍ1절 기념행사가 일회성 행사에 그치지 말고 올 3월 부터라도 한달간 범국민 애국계몽운동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유관순 열사에 대한 대대적 추모운동과 역사적 재평가 작업은 물론 선열들이 피흘려 지켜온 이 나라 국민 모두가 애국심을 키워 국민통합으로 찬란한 대한민국의 새 장을 여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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