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왜곡', '다케시마' 등 한일 간 분쟁 갈등을 빚는 요즘. 선열들의 정신을 계승하고 다시금 아픔을 겪지 말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대전과 충남 지역에는 수많은 애국지사가 있었지만, 현재 5명만이 생존해 있다. 대전에 조일문(96)옹과 정완진(86)옹, 정낙진(88)옹이 있으며 충남에는 조동빈(89)옹과 이일남(88)옹이 있다. 일제에 맞서 학생운동을 펼치고 광복군에 지원하는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젊음을 바친 이들. 하지만, 그 대가로 일본 경찰과 헌병에 체포돼 옥고를 치르고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정낙진(대전 중구)옹은 1941년 일본 동경철도학교 재학 중 항일결사 '우리조선 독립그룹'에 가입하며 활동했다. 정 옹은 공주에서 항일운동을 펼치다 일본 경찰에 발각돼 모진 고문을 받았다. 그는 고문의 충격에 정신장애가 일어나 병원에 입원하는 고초를 겪었다.
정완진(대전 유성구) 옹은 1943년 대구상업학교에 다니다가 항일학생결사체인 '태극단'에 가입했다. 하지만, 그는 항일운동 벌이다 동료의 밀고에 일본 경찰에게 고문을 받기도 했다.
조일문(대전 유성구) 옹은 남경의 중앙대학 재학 당시, 동료와 '한족동맹'이라는 비밀결사단을 조직했다. 조일문 옹은 1944년 일본군의 기밀문서를 빼앗아 독립군의 대일작전 수행에 일조했고 광복군에서도 활동했다.
조동빈(천안) 옹은 22살이 되던 1945년, 일본 도쿄에서 학교에 다니다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 그가 상해로 건너간 것은 일본의 강제징용을 거부하는 이유에서다. 상해에 건너간 조 옹은 광복군에 입대했다. 그는 중국 내 일본의 주요 요인에 대한 암살 훈련을 받았으며, 임시 정부 선전 활동 등을 펼쳤다.
이일남(금산) 옹은 1942년 재학 중인 전주사범학교의 일본인 교장이 한 민족차별교육에 항거하고자 '우리회'를 조직했다. 우리회는 학교의 병영화와 조선인을 노예로 취급정책에 맞서기 위한 학생들의 결사체였다. 이 옹은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의 자금책이자 국내의 상황을 전해주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활동 중에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돼 교도소에서 광복을 맞았다.
강우성 기자 <사진제공=광복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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