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난순 교열부장 |
초등학교 2학년 여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당시 우리집을 둘러싼 돌담밑엔 채송화, 맨드라미, 봉숭아꽃이 울긋불긋 만발해 있었다. 난 그 예쁜 꽃들을 감상하다 봉숭아꽃의 무성한 이파리들 속에 있는 벌레를 발견했다. 어른 손가락만한, 짙은 밤색의 흉측한 벌레였다. 공포와 분노에 찬 나는 불에 달군 부지깽이로 그 벌레를 막 지졌다. 벌레는 거대한(?) 몸뚱어리를 둔하게 꿈틀거리면서 초록빛깔을 띤 액체를 토해냈다. 고통에 찬 벌레의 몸부림은 내 안의 잔인하고, 두렵고, 어마어마한 쾌감의 원천에 몸을 떠는 괴물을 일깨웠다.
나를 조종하는 내 안의 낯선, 섬뜩한 '괴물'은 무엇인가. 아니면 그 괴물은 온전히 나의 '의지'일까. 나의 심리적 삶에 침입해 균형을 깨뜨리고 교란시킨 어떤 '트라우마'가 무의식에 존재하고 있나. 영화 '데미지'에서 안나는 남자친구의 아버지와 정사를 치른후 “기억하세요. 상처받은 사람은 위험해요”라고 경고했다.
상처(트라우마)는 공포를 낳고 폭력을 동반한다. 모든 문명의 바탕에는 공포가 깔려있다. 고도의 문명을 세운 인간일지라도 유전자에 각인된 원초적인 공포는 극복될 수 없는 한계다. 특히 실재적인 위험에 노출된 인간이 느끼는 공포는 그 인간의 실존을 이루는 요소가 된다.
나치의 대학살은 유대인에게 치유될 수 없는 공포를 안겨주었다. 그들의 가공되지 않은 공포는 잔인함과 야만성을 낳는 결과를 초래했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프리모 레비는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굴욕의 상처는 우리안에 영원히 남을 것이며, 그것은 끝없는 증오를 낳게 하고 복수를 향한 갈증으로 가득하게 할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오늘날 이스라엘을 창건한 유대인에게 아랍인은 나치와 동일시되고 있다. '유대인학살'에 대한 기억은 이스라엘을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둔갑시키는 동기가 된 이유다. 팔레스타인을 향한 이스라엘의 폭력은 '기억'이 얼마나 무섭고 파괴적인 무기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유대인들의 고난과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와 이웃하고 있는 일본은 20세기초 서양에 대항하는 동양이라는 구호를 내세워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했다. 그 결과는 난징대학살, 731부대 생체실험, 위안부 연행을 비롯 우리나라의 경우 한일합방으로 인한 가혹한 식민통치로 이어졌다. 일본에 대한 우리의 고통스런 기억은 앙금이 되어 또다른 사회적 현상과 감정으로 자리바꿈을 하면서 드러난다.
한국인의 치유되지 않은 앙금은 6ㆍ25전쟁으로 인한 남북분단이라는 체제에 전이되어 '레드 콤플렉스'라는 괴물을 탄생시켰다. 빨갱이, 좌파가 갖고있는 어두운 그림자는 지금도 한국인을 극도의 공포로 몰아넣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박정희는 레드 콤플렉스를 통치수단으로 삼아 '좌익용공분자'라는 굴레를 씌워 민간인을 죽이고, 고문하고, 가두는 만행을 저질렀다. 광주학살도 전두환 일당이 권력을 공고히 하기위해 '북한 특수부대의 소행'이라며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한 참극이었다. 비이성적이고 잔인한 이러한 행동은 인간은 아폴론적이 아니라 디오니소스적임이 분명함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은 3ㆍ1절. 경기침체로 인한 일본의 우경화가 심상치 않다. 거기다 북한의 3차 핵실험등 현재 한반도와 동북아 정세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역사는 움직이는 유기체의 성격을 띠고 있다. 힘의 논리가 어느 한쪽에만 영원히 치우치진 않는다. 이쯤에서 비현실적인 상상을 해본다. 만약 우리가 어느 나라를 침략해 지배하는 입장에 서면 우리는, 나는 어느 쪽일까. 잔인할까, 덜 잔인할까?
『밤과 안개』는 유대인 심리학자 빅토르 프랑클의 수용소체험기다. 책에서 프랑클은 해방된 후 한 동료가 “내 아내와 자식이 죽었는데 뭔 대수냐”며 들판의 어린 농작물을 마구 짓밟는 것을 보고, 수용소에 억류됐던 사람들이 억압자가 될수 있음을 밝혔다. 그러나 프랑클은 설사 부당한 일을 당했다 하더라도 누구에게도 부당한 일을 저지를 권리가 없다는 깊은 성찰을 보여주었다. 내 안에 숨어있던 끔찍한 괴물은 모습을 드러냈다. 늦었지만 곪은 상처는 말해져야 하고 이제라도 씻어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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