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지호 고암미술재단 대표 |
모딜리아니와 같이 가난했던 동료 화가들과 달리 피카소는 안정된 생활 속에서 여유 있는 삶을 살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작품에서도 그는 불행이나 슬픔을 노래하기보다는 행복과 환희를 더 표현했다. 화가로서의 이른 성공 덕에 그의 예술은 대체로 확신과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를 떠난 지 40여 년의 시간이 흘러간 지금도 여러 여인과 나누었던 그의 러브스토리는 소설과 영화로 만들어져 만인에게 회자하고 있다. 그가 남긴 작품들의 재산적 가치에 대해서도 매스컴은 특종으로 다루고 있다.
세계 최대의 미술품 경매시장인 '소더비'와 '크리스티'에서 피카소의 작품이 기존 경매가를 경신했다는 소식이나 해외 선진미술관에서 가장 많은 입장객을 동원한 전시가 피카소 전이라는 소식 등이다.
하지만, 화려함 뒤에 숨겨진 피카소는 누구인가. 젊은 시절 혹독하고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했다면 지금의 피카소가 있을 수 있었을까. 피카소 작품 중에는 극도의 불안과 피로, 우울로 가득한 모습이 담긴 자화상이 있다.
“나는 고독 없이는 아무것도 달성하지 못한다”라 말했던 피카소의 작품, '코트 입은 자화상'(1901년)은 가난과 절친의 죽음 앞에 선 피카소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은 피카소의 청색시대(1901~1903) 대표작 중에서도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 시기의 작품들에는 '예술과 낭만의 도시' 파리의 명성을 찾아 유학 온 이방인 피카소가 파리 화단에 정착하며 견뎌내야 했던 가난과 고독 그리고 외로움이 진하게 반영되어 있다.
특히, 자화상은 유화 작품으로 당시 어두운 환경에 놓여 있던 자신의 모습을 마치 고독하고 불쌍하며 버려진 존재처럼 표현했다. 친한 친구 카를로스의 자살 소식을 들은 피카소가 겪은 극도의 우울함과 슬픈 감정이 깊게 내재해 있다.
자화상을 보면 짙은 감색 코트에 깃을 목 위까지 올리고 정면을 강하게 응시하며 외롭게 서 있는 스무 살의 피카소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그는 화면의 배경을 연한 푸른색으로 처리하여 분위기를 더욱더 무겁고 우울하게 만들어 극도의 고독감을 표현했다. 머리와 수염, 눈동자까지 코트와 같은 어두운 색을 사용하는 등 세심한 표현은 무시되고 전체적으로 단순하고 도식적으로 처리해 화면의 통일성을 추구하였다. 이 탓에 움푹 팬 창백한 얼굴 위 짙은 눈동자는 스무 살의 피카소라고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게 나이가 들어 보인다.
하지만, 오히려 나이에 맞지 않는 심각한 표정에서 슬픔을 극복하고 20세기 최고의 거장이 될 젊은 화가의 미래가 점쳐지는 이상한 마력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피카소는 “나는 결코 어린아이처럼 데생한 적이 없다. 열두 살 때 이미 라파엘로처럼 그렸다”라고 말할 정도로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에 천재성을 보였다.
피카소는 1900년 19세의 나이에 파리를 처음 방문했으며, 일생 대부분을 프랑스에서 보내는 등 프랑스와의 인연이 매우 깊었다.
처음 파리에 도착했을 당시, 그는 화려함의 이면에 가려진 파리의 빈곤과 비참함을 목격하고 주로 하급계층 생활의 참상과 고독감이 두드러지는 '청색'의 작품들을 그렸다. 1904년에는 몽마르트르에 아틀리에를 마련하며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연애를 했다. 이때의 그림 색상은 청색에서 장밋빛으로 점차 밝아지기 시작한다. 1909년에는 분석적 입체파, 1912년부터 1923년까지는 종합적 입체파 시대에 들어갔다. 이 무렵 그는 이미 20세기 회화의 최고 거장이 된다. 이렇듯 그는 평생 모든 주제를 다루었고 할 수 있는 모든 양식을 실험했던 전위 미술가이자 예술 혁명가였다.
하지만, 19세기 말 유럽을 휩쓴 낭만주의와 퇴폐주의 영향, 무명작가로 가난을 벗 삼고 실험과 광기가 충만했던 '청색시대' 속 피카소 예술이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본다면 '코트 입은 자화상'은 파카소의 최대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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