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규 대전둔산초 교장前충남서예가협회장 |
이에 진노한 무제는 사마천을 옥에 가두고 궁형(宮刑:생식기를 잘라 없애는 형벌)을 내렸다. 세인들은 이때의 일을 '이릉의 화(李陵之禍)'라고 말한다. 사마천은 친구(親舊)인 임안에게 참담한 심경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내가 법에 의하여 사형을 받아도 아홉 마리의 소 중 터럭 하나 없어지는 것뿐이니(구우일모:九牛一毛), 나와 같은 자가 땅강아지나 개미 같은 미물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리고 세상(世上) 사람들은 내가 이런 수치스런 일을 당하고도 죽지 않았으니 졸장부라고 여길 걸세.” 사마천이 이러한 자신의 처지를 가슴 아파하면서도 치욕을 무릅쓰고 살아가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당시 태사령(조정의 기록사서)이었던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이 임종 시 통사(通史)를 기록하라고 한 유언에 따라 사기(史記)를 집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2년 후 중국 최초의 역사서로서 불후의 명저로 손꼽히는 사기(史記) 130여권은 BC 97년에 완성되어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다.
우리도 나라를 위한 평화통일의 바른 길을 알고 주변국들에 의해 흔들리지 말고 더욱 강건한 국민적 자기 업무를 충실히 실행해야 할 것이다.
박일규 대전둔산초 교장前충남서예가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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