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덕재 시인ㆍ대전시 인터넷방송 PD |
필자가 크리스와 인연을 맺은 지 벌써 10여년째다. 대전의 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그가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은 4년 전으로, 처가가 위치한 부여에 허름한 농가와 텃밭을 마련하며 그의 삶은 상당 부분 바뀐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주중에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주말이면 농가가 있는 부여로 달려가 호미와 삽을 들었다. 그의 초기 농사법은 경험보다는 지식에 우선했다.
하지만, 그가 공부한 지식을 한 방에 날려버린 사례는 한두 번이 아니었다. 동네 어른들의 오랜 경험 앞에서 캐나다에서 물 건너온 농사 관련 책이나 유튜브 사이트의 농사짓는 영상은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가 심었던 작물들은 매우 다양하다. 고추와 가지, 오이, 브로콜리, 무, 당근 등등 종류만 해도 상당수다. 물론 김장 배추도 직접 재배했다. 얼마 전에는 밀 수확을 했다며 밀가루 한 봉지를 선물하기도 했다. 밀 수확량이 다섯 되밖에 되지 않았으니 밀가루 한 봉지의 양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농사에 임하는 태도의 핵심 중 하나는 새로운 것에 대한 관심이다.
작은 텃밭에 밀을 심고 수확한 밀을 집에서 직접 갈아 밀가루를 만들겠다며 도구를 산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직접 수확한 방울 토마토를 안주로 삼아 맥주를 마시거나 잘 키운 당근을 그의 아들 벤자민이 간식처럼 먹는 것을 보면 그와 가족들이 부여의 작은 농가에서 즐기는 인생의 풍요로움을 짐작할 수 있다.
그에게 농사를 지으며 가장 기뻤을 때를 물어본 적이 있다.
필자는 감자를 많이 수확하거나 싱싱한 당근 혹은 속이 탱탱한 배추나 몸매가 잘빠진 무 수확을 얘기할 줄 알았지만, 전혀 기대하지 않은 답이 돌아왔다. 가로세로 다섯 뼘쯤 되는 밭에 실험적으로 심어놓은 '마운틴 스트로베리'를 심었던 게 가장 기뻤다고 했다. 야생딸기랑 비슷한 작물의 수확량은 숫자를 셀 수 있을 만큼 적은 양이었으나 모닝커피 한 잔을 들고 나와 하나씩 따먹는 건 남들이 모르는 그만의 즐거움이었다고 한다.
그는 누구보다도 농사짓는 사람들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있다. 그는 농사는 참으로 위험한 일이라고 말한다. 건강을 해칠 정도로 일하고 잘 지어놓은 농사가 태풍이나 기상이변으로 한 번에 날아가기 때문에 참으로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힘든 일을 평생 해 온 농부들은 날씨의 변화를 몸으로 체감하며 예언한다. 또 상황을 짐작하며 경험의 지혜를 발휘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경험과 지혜도 개방이라는 파도 앞에서는 때로는 무력해질 수밖에 없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많은 사람이 쓰러지고 떠나가지만, 여전히 농촌을 지키는 농부들은 많이 있다.
크리스가 초보농부 딱지를 떼려면 아직도 멀었지만, 입춘이 지나자 '씨앗 심고 모종을 심고 싶다'는 그의 말을 들은 사람이라면 '이 사람 벌써 농부가 다 됐네'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는 봄이 오면 금요일 저녁이나 토요일 아침에 부여로 향할 것이고 도착하자마자 삽과 호미를 들고 텃밭에 나갈 것이다. 그와 부인이 함께 밭을 갈면 초등학생인 벤자민은 부모가 갈아놓은 이랑을 무너뜨리며 장난을 칠 것이고, 농사짓는 법을 알려주는 장인과 장모는 어린 외손자 장난을 보는 재미에 환한 표정을 지을 것이다.
세종대왕이 추진해 펴낸 『농사직설』의 서문에 '풍토가 다르면 농사법도 다르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풍토가 다른 이역만리에서 건너와 부여의 한 시골에서 농사짓는 크리스의 모습을 세종이 보고 있다면 어떤 말을 할까. 아마도 풍토가 다르면 농사법이 다르지만, 농사를 짓는 마음은 다를 수 없다고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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