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든 어린 것들을 깨운다. 마름질하고 다림질한 한복. 옷고름, 대님 매는 것도 어색하기만 하지만, 사각거리는 한복에서 풍겨 나오는 이 풋풋한 냄새. 설날의 냄새.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세배드리러 가는 아침이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렇게 아름답고 귀한 풍습이 있을까.
새해 첫날 어른들에게 공경과 축복을 기원하는 세배를 드리고, 자손들에게 위엄있게 덕담과 용돈을 내려주는 세배 풍습이야말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전 세계로 확산되었으면 할 정도로 감동적인 고품격의 우리 풍속이다.
세뱃돈이 어디서 유래되었는가가 궁금하다. 세배를 하면 돈을 주는 풍습이 고대로부터 오는 풍속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유교사회에서 돈을 주고받는다는 건 썩 격이 있는 이미지는 아니었지 않은가. 문헌을 찾아보니, 설날에 액(厄)을 막는 풍습이 있어서 제웅이라는 짚으로 만든 인형에 액을 담아 섣달 그믐날 길바닥에 던져두는 풍속이 있었는데, 걸인이나 아이들로 하여금 주어가게 하고자 짚 인형 뱃속에 동전을 담았다. 그렇게 해서 불행이 옮겨갈 수 있을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기 집 아이들에게는 돈 욕심에 버려진 제웅을 줍지 못하도록 설날 '세뱃돈'이라는 것을 주었다는 설이 있었다.
세뱃돈의 유래다.
하지만 양가집에서는 아이들에게 설날 세뱃돈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선비 집에서는 세배를 가면 세뱃돈 대신 글을 써서 봉투에 넣어주었다는 것이다. 집에 돌아와 무릎을 꿇고 펴 보는데 대개 한자(漢字) 서너자가 씌어 있게 마련이라 했다. 외자면 일자훈(一字訓), 석 자가 씌었으면 삼자훈(三字訓)이라 했다. 그 아이에게 주는 훈계의 글로, 이 글을 한 해 동안 머리맡에 붙여두고 조석으로 조심케 했다는 것이다. '세뱃글'이라 했다.
어른께 세배를 하면 아이에게 돈을 주기보다 아이가 올바로 커나갈 수 있도록 글을 교훈으로 내려주었던 것이다. 과연 기품과 뼈대있는 동방예의지국의 풍습이었다.
세뱃글 중 일자훈(一字訓)으로는 소 우(牛)자를 많이 써주었다고 한다. 작은 일에도 산만한 아이에게 소같이 우직하고 신중하라는 훈이 담겨 있었다. 많이 쓰여진 삼자훈(三字訓)으로는 '행중신(幸中辛)'.
행(幸)자 속에는 쓰라릴 신(辛)자가 들어 있음을 가르쳐주는 교훈이었다. 행복이란 반드시 쓰라린 역경을 겪고 극복했을 때 얻어지는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칼을 다루듯 마음을 신중히 하라는 '인중도(忍中刀)'라는 글도 있었다고 한다. 과연 우리 조상들은 깊이와 품격이 있었다. 이 얼마나 멋지고 그윽한가.
이 아름다운 풍속을 오늘에 되살릴 수는 없을까.
돈과 황금만이 세상의 가치인양 천박해지고 있는 요즘의 세태를 세뱃글을 통해 신선하게 바꾸어 볼 수는 없을까. 반드시 고풍스런 한문으로 세뱃글을 써줄 것은 아닌 것 같다. 단지 아이들에게 올 한 해 경계하고 고쳐나갈 부분이 있으면 이를 지적해주면서, 설날 읽어볼 첫 글이니 격려와 칭찬으로 시작하는 덕담의 편지라면 족하지 않을까. 비단 아이들뿐이랴. 아내에게도 지난 한해의 노고를 감사해하며 올 한해도 힘을 합쳐 더 행복하게 살아보자는 축복의 글을 써주면 얼마나 행복해 할까. 세뱃돈에만 눈이 쏠려 있을 어린이에게 새해 첫 어른들의 교훈을 글로 깨닫게 해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새해의 축복이 아닐까.
세뱃돈과 세뱃글. 어찌 둘을 맞비교할 수 있으랴. 세뱃글은 억만금의 세뱃돈 같은 것이리라. 우리 조상들은 참으로 고아한 품격을 가르쳐 주었다.
새해 첫날 이른 새벽. 세뱃돈과 함께 세뱃글로 올 한 해를 열어보자. 세배의 품격과 뜻을 더욱 깊게 하는 세뱃글이 들어있는 흰 봉투를 열면서 가족과 자녀들의 건강과 행운을 비는 축복의 마음으로 새로운 신기원을 열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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