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운석 경제부장(부국장) |
1970년대만 해도 쇠고기국은 명절이나 제삿날 외에는 맛보기가 힘들 정도로 가난했던 시절이었다. 설날 설빔 입을 설렘에 밤잠을 설쳤던 기억과 아침 차례 지낸 뒤 동네 어른들을 찾아 세배 드리고 세뱃돈 받던 추억은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다.
며칠 후면 음력 정월 초하루 설날이다. 설을 쇠기 위해 고향을 찾는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된다. 설은 본디 '섧다'에서 유래된 것으로, 서기 488년 신라 비천왕 시절부터 설날이 있었던 것으로 삼국유사에 기록돼 있다. 고기(古記)를 보면 정월 초하루 백제의 왕은 화려한 새 옷을 갈아입고 정사를 보았으며, 천지신에게 제사지내고 백성들은 술과 노래로 하루를 즐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백제 고이왕대의 기사를 보면, 이같은 흥미있는 풍속을 읽을 수 있다. 임금은 새해 첫날 자대수포(紫大袖袍ㆍ자주빛 소매 넓은 도포)에 청금고(푸른 비단바지)를 입고 금화식오라관(金花飾烏羅冠ㆍ금꽃으로 꾸민 관)을 쓴 채 남당(南堂)에서 정사를 보았다는 것이다. 정월에는 많은 죄수를 사면했으며, 빚만을 구휼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같은 세시풍속이 이어져 내려오면서 설날에는 설빔으로 단장하고 조상에 장사를 지내며 세찬과 술로 하루를 즐겼다 한다.
설날은 1895년 을미개혁 당시 없어지기도 했으며, 1910년 한일병합이 되면서 조선의 문화말살 정책을 편 일제(日帝)는 오랫동안 이어져온 조선의 음력설을 없애기 위해 매년 양력설(신정)을 의무적으로 보내도록 했다. 음력설에 차례를 지내거나 떡방앗간에서 떡을 돌리면 처벌했고, 조선인들 중 음력설에 세배를 간다거나 하얀옷을 입은 사람에게는 검은 물이나 오징어 먹물 등으로 물총을 쏴서 옷을 얼룩지게 하는 등 온갖 박해를 가했지만 해방이 될 때까지 음력설을 없애지는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해방 후에도 이승만 정부와 경제성장을 강력히 추진하면서 구식타파와 이중과세 방지를 주장했던 유신정권 때에도 양력설(신정)을 의무적으로 보내왔다. 1985년 '민속의 날' 로 제정돼 신정과 병행하다가 1989년 음력 1월 1일 90년만에 공휴일로 복원되고 본래 이름(설날)도 되찾았다.
예로부터 설날을 원일(元日)ㆍ원단(元旦)ㆍ정조(正朝)ㆍ세수(歲首)ㆍ세초(歲初)ㆍ세시(歲時)ㆍ연두(年頭)ㆍ연시(年始) 등의 한자어로 쓰기도 했다. 신일(愼日) 또는 근일(謹日)이라 해서 설날에 모든 행동거지를 조심했던 것은 후대 유풍이 아닌가 생각된다. 설날은 기쁜 날이기도 하지만, 한 해가 시작된다는 뜻에서 모든 일에 조심스럽게 첫발을 내딛는 매우 뜻 깊은 명절로 여겨져 왔다. 그래서 설날에는 바깥에 나가는 것을 삼가고 집안에서 지내면서 일년동안 아무 탈 없이 지낼 수 있게 해주기를 신에게 빌어 왔다.
설날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설빔을 입고 조상께 차례를 지낸 뒤 나이가 많은 어른들께 새해 인사인 세배를 드렸다. 세배할 때는 새해 첫날을 맞아서 서로의 행복을 빌고 축복해 주는 덕담을 주고 받았다. 이렇듯, 새해 첫날인 설날은 하루 종일 복을 빌고 좋은 말을 많이 했다. 설날의 어원 설이란 새해의 첫머리란 뜻이며, 설날은 그 중에서도 첫날이란 의미를 지닌다.
오늘날 설날 풍속은 레저 풍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이 변했다. 설날 해외로 여행을 떠나거나, 휴양지를 찾는 가족들이 늘면서 설날 정겨웠던 세시풍속은 사라져가고 있다.
민족의 명절 설날 세시풍속이 제자리를 찾으려면 정겨웠던 옛 정서를 되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이를 위해서는 예로부터 전해 내려온 전통적 세시풍속 복원 노력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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