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명식 대전 시민아카데미 대표 |
좋은 영화, 훌륭한 고전을 사람들이 찾고 접하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이다. 익숙하지 않은 형식의 영화와, 장장 2500쪽이 넘는 거대한 소설이라는 점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영화 '레 미제라블'이 이른바 '힐링무비'로 이야기 된다는 사실에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점들이 있다. 이러한 주장의 바탕에는 이 영화가 2012년의 대선에서 야권을 지지했던 48%의 유권자들이 느낀 상실과 좌절감에 위안이 되기에 적절하다는 것이다.
역사의 발전에는 수많은 고통과 좌절이 점철되어 있다는, 사회의 진보에는 수많은 퇴행과 반동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그래서 지금 이 현실에서의 실패와 좌절의 상처는 충분히 딛고 일어설 수 있을 것이라는 위안. 특히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함께 부르는 노래 '민중의 노랫소리가 들리는가(Do you hear the people sing)'는 “오늘 우리가 죽으면 다른 이들이 일어서리. 이 땅에 자유가 찾아올 때까지”라는 가사와 합창의 장엄한 감동으로의 어우러짐은 이러한 시각이 나름의 근거가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게 하기도 한다.
문제는 왜 '힐링'인가 이다.
우리는 그동안 이와 유사한 용어 또는 사회-문화적 담론들이 유행처럼 번지고 유통됐다는 것을 알고 있다. '웰빙', '부자되세요', '안전(safety)' 그리고 이제는 '힐링'이다. '웰빙 음식', '웰빙 건강법', '웰빙 주말', '웰빙 여행', '웰빙 인테리어' 등등에서 이제는 '힐링 음식', '힐링 건강법', '힐링 주말', '힐링 여행', '힐링 인테리어' 등이 있었다.
대부분 이러한 담론들은 우리 사회나 개인의 사회적 삶에 대한 차분한 분석이나 이론적 검토를 통해서 형성되어온 적은 없는 것 같다. 이러한 언어들은 방송과 상업적 광고를 통해서 제시되고 유통이 되며 이것이 마치 시대의 정신이나 사회-문화적 담론이나 되는 양 얼치기 지식인과 평론가들을 통해서 재생산 되는 양상이다.
'힐링'이란 말 그대로 몸이나 마음의 상처를 회복 또는 치유한다는 말이다. 즉 '힐링'은 이미 상처와 아픔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그런데 상처와 아픔의 원인과 정도, 위치 그리고 그것의 진행과 현실적 구성은 온데간데없고 치유된 상태, 회복된 상태, 건강한 정상성 만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에 가장 근접한 용어는 '힐링'이 아니라 '환상'이다. 환상은 보이는 현실에 눈을 감아 버리고 가상의 실재에 주체를 옮겨버리는 일이다. 그래서 환상은 끊임없이 새로운 환상을 만들어 내야만 작동한다. 이러한 환상의 연쇄 고리를 끊어내는 것은 철저한 자기인식과 반성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힐링'으로 가는 첫걸음이다.
'레 미제라블'.
말 그대로 '불쌍한 사람들'이란 뜻이다. 이미 아픔과 상처를 그 안에 다 지니고 있는 말이다. 프랑스의 대혁명과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 속을 격동적으로 헤치고 살아온 민중들의 삶을 세세히 그려낸 대서사시 '레 미제라블'. 그러나 그 영화와 소설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정의의 승리나, 역사의 발전과 같은 판에 박은 당위가 아니다. 역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인간 하나 하나의 삶과 사회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정의나 혁명의 승리의 수준을 뛰어넘는 인간의 평생을 다하는 자기반성과 성찰을 통해서 얻어지는 실천이다.
그리고 그 실천은 프랑스 혁명의 이념의 끝. 다름 아닌 '박애'다. 장발장과 자베르가 보여 주는 모든 것이 이것이 아닐까. 진정한 '힐링'은 상처를 들여다 보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