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지호 고암미술문화재단 대표 |
날씨가 좋은 주말이면 가족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의 행복한 모습들로 미술관 주변의 광장은 인산인해다.
급기야 젊은 남녀들은 미술관에서 조각공원으로 조성해놓은 잔디밭 위에 자리를 펴고 한가로이 누워 있다. 그들의 자연스런 모습이 창 너머로 전시장 안에서 보인다.
언젠가 '명화란 무엇인가? (Masterpiece?)'라는 제목의 전시가 퐁피두-메츠 미술관(Centre Pompidou-Metz)에서 있었다.
명화의 사전적 정의는 아주 잘 그려서 이름이 난 그림이라고 한다.
루브르박물관의 소장품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부터 프랑스 국립현대미술관의 피카소와 마티스의 작품까지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명작들이 거의 다 출동한 전시회였다. 전시품 중에서는 무명의 장인이 제작한 생활용품이나 아프리카 원시인들의 주술용 오브제들도 전시되었다.
기획자는 명화인 것과 명화가 아닌 것의 모호한 경계에 주목했다.
사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은 실내 장식을 하려는 귀족들의 주문에 의해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주문 제작하는 장인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보기에 아름다우면 예술이고, 쓰기에 편리하면 기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술과 예술의 차이가 모호하듯, 기술과 예술을 겸비한 무명의 장인들이 만들었던 공예품은 예술인가?
하지만, 이 전시는 뜻밖의 결론을 내렸다. 결론을 내리기 위해 이 전시의 마지막 전시장의 내부를 통유리로 만들었다. 바깥 자연의 경치가 훤하게 보이는 거대한 유리창으로 세상이 보인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거대한 하늘과 땅, 그리고 맑은 공기의 모습.
마치 19세기 자연주의 화가인 밀레의 따뜻하고 서정적인 풍경화를 보듯 자연이 주는 숭고함과 경이로움의 절대미에 압도당했다. 이 또한 명화가 아닌가? 최고의 명작이라 할 수 있고 그것을 담아낸 전시장이야말로 최고의 캔버스라 할 수 있다. 신이 인간에게 내린 자연, 그 안에 인간이 들어갔을 때 명화가 완성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전시였다.
그렇다. 바로 자연의 변화에 따라 울고 웃는 우리의 삶이 명화이며 우리가 곧 명화의 주인공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울러 이 전시는 각기 다른 인간의 다양한 삶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비단 작품만은 아니라고 증명했다.
바로 미술관이야말로 인간의 깊은 고뇌와 삶의 희열이 표현된 작품들을 담아내는 백색의 '빈 캠퍼스'라고 한 것이다.
이응노미술관의 건축가인 로랑 보두엥(Laurent Baudouin)은 우선 고암 이응노의 작품에 반했으며,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좌절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와 작품에 대한 꺼지지 않는 열정 때문에 그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는 먼저 초기 서예에서 시작해 문자추상 그리고 군상으로 이어지는 고암 이응노의 작품 연구부터 했다. 보두엥은 이응노의 파란만장한 삶의 굴곡을 가슴 아파했고, 그의 끈질긴 작업에 대한 투지를 존경하고 사랑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을 예술로 승화시킨 고암 이응노 화백의 예술정신을 건축에 담아내고 싶었던 로랑 보두엥은 미술관의 벽면을 대부분 유리창으로 처리했다. 유리창 너머에 화가가 평생 죽도록 그렸던 대나무와 소나무를 심어서 그의 예술혼을 담아내고자 했다. 그는 빛과 공기, 사람과 풍경, 작품과 자연 등 명화라고 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이응노미술관에 담아내려 했던 것은 아닐까?
결국, 명화도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이며, 그것을 통해 결정되는 사물의 가치에 대한 성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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