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카 이전 페루문명의 에로틱 도자기들이 떠올랐다.
선진 인류의 질펀한 애정 행각이 담긴 그릇들이 왜 떠올랐을까.
시선은 매화가 박힌 고상한 컵에 꽂히면서 사교상의 멘트는 달랐다.
“경쾌하고 스포티함이 마음에 들긴 드는데….”
사람이 이렇다.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기뻐하기 위해 받기도 한다. 마음 깊이 자리한 분신 같던 분실물에 대한 보상심리의 발동일 수도 있다.
최근 잃어버린 물건 중 아깝고 안타까운 것은 1960년대 말의 사진이다. 초등생답지 않은 등산모, 멋으로 짚던 지팡이, 무엇보다 웃옷에 'Smart'(스마트)라는 이탤릭체 글자가 새겨진 희귀본이었다. 햇살 좋은 날 찍은 그 흑백사진을 '스마트 시대' 선견지명 어쩌고 미리 못 써먹은 게 한이 된다.
무언가가 내 것이 되는 두 방식에 사물이 자아로 편입되기, 자아가 사물을 넘어 외연 확장하기 두 가지가 있을 때, 그 사진은 이 둘 모두다. 그렇다고 인형에 집착하는 아동의 대물애착 같은 심리는 아니고, 꼭 밝히자면 스스로 정체성을 확인하던 기억의 회로 같은 매개물이다.
가수(혹은 화가) 조영남이 쓴 책에 도올 김용옥의 은귀이개 소동이 등장한다.(『조영남 길에서 미술을 만나다』) '어느 날 아침 김용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난데 말야”로 시작해서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20여년 간 애지중지 써 온 귀이개가 하루아침에 증발했다는 얘기였다.' 귀이개 하나에 싱겁게 무너진 도올은 집착에 관한 확실한 지존이었다.
한 주 전에 이어 12일(토) 밤 TV 예능 프로그램 '두드림'에 도올이 출연, 문제의 귀이개 얘기를 꺼냈다. 그가 프로이트까지 거론하며 아내를 다그친 그 귀이개에 서린 비논리성의 논리를 우리는 일상에서 경험하고 산다. 신영복의 벼루, 차범근의 계란 받침대, 이어령의 책상, 문재인의 바둑판 비슷한 것을 많은 남자들이 소유한다. 김정운 교수가 칭한 '남자의 물건'들이다.
정리의 달인들에 따르면 '청소나 수납은 생활과 인생을 통제하는 것'이라는데 여기서도 예외인 경우다. 마니아적 감성, 애착의 생존본능, 다른 뭐라 이르든 좋다. 왜 좋아하느냐처럼 어리석은 질문이 또 없다. 물건도 사랑도 관계도 논리와 합리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두드림' 엔딩곡인 박완규의 '정리'에 답이 들어 있다. '어지러운 이 맘 가득 온통 그대뿐이라서 치우다가 치우다가 그만 두기로 하오~'
배불뚝이 지갑을 비우듯 버려야 할 시간, 공간, 인맥. 불편한 옷, 포기한 책, 헤어지긴 아까운 사람. 모두 버리기 쉽지 않다. 필자의 예로 낡은 가죽가방을 특별히 넣은 것 없이도 지니고 다녔다. 하필 그때 무슨 이유로 사진을 넣어두었고 그 가방을 분실했다. 소중히 여기면 소중하지 않는 게 있으랴만, 끊고 버리고 떠나는 '단(斷), 사(捨), 리(離)'의 절차를 초월한 물건들이다.
상실의 아픔을 조금은 채워줄, 그래 주기를 바라는 이 도자기 머그컵이 푸근한 상상 창고가 되거나 친숙한 '물건'이 되어 버리기-보관하기-숙성하기 과정도 겪겠지. 격이 안 맞으면 안 맞는 대로, 이 여유로운 컵에 어울릴 커피로 에스프레소 로스트 원두를 볶아 왔다. 원재료의 200% 맛을 이끌어낼 것만 같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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