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덕기 편집부국장 |
필자는 선거를 치를 때마다 과거 외지인으로부터 들었던 얘기가 뇌리를 스치곤 한다. 사업때문에 대전에 장기체류중이던 호남에서 왔다는 한 사업가와 벌였던 논쟁이 시나브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 사업가는 다소 비아냥 섞인 투로 충청주민들의 투표행태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질문을 던진 바 있다. 자신이 충청도에 와서 몇번의 선거를 지켜보니 충청인은 지역기반 정당도 확실히 밀어주지 않을 뿐 아니라 정치적 힘을 갖는 중량감있는 다선 정치인도 키우지 않는다는 지적이었다. 그가 볼 때는 충청주민들의 투표행태가 달갑지 않았나 보다.
그 때 필자는“수도권을 뺀 지방중에선 충청도 표심이 가장 다양하게 표출되고 있다. 이는 다른 지역에 비해 냉철하고 이성적으로 투표하기 때문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충청권에선 어느 정당이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고 정치 초년생도 자신이 얼마 만큼 하느냐에 따라 당선의 영광을 누릴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래도 그 사업가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그 사업가에게 반문했다. “알다시피 영ㆍ호남은 특정정당의 공천이 곧 당선 보증수표 아니냐. 당신이 정치입문객이라면 특정정당 공천을 보장받지 못할 때 영호남과 충청지역 중 어느 곳의 정치환경이 선진화 됐다고 보는가?”
그 사업가가 충청민들에게 던진 지적은 지역역량을 키우라는 충고로 받아 들이고 싶다. 아직도 특정지역에선 특정정당 막대기만 꽂으면 '싹쓸이'하는 게 우리네 정치판이다. 특정 정당의 특정지역 몰표현상도 유권자의 뜻인 만큼 폄하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정치발전과 민주주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선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한 국가의 정치수준은 그 나라 국민의 민도를 반영한다 하지 않는 가?
지난 대선 결과를 놓고 세간에선 재미난 얘기들이 오가고 있다. 부산, 울산, 경남에선 정치발전의 희망을 보았다는 것이다. 이들 지역은 전통적으로 새누리당 지지세가 강했던 곳이지만 과거에 비해 지역색과 특정정당 쏠림을 탈피한 표심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부산, 울산, 경남에서 투표자의 45.5%, 46.7%, 48.3%의 지지를 획득해 아성을 지켜냈지만 제 1야당인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도 30.3%, 31.1%, 27.8%의 지지를 얻어 야당의 가능성도 엿보게 됐다.
그러나 대구, 경북에선 여전히 제1야당 후보가 투표자의 15.5%, 14.5% 밖에 얻지 못해 기존 장벽의 틀을 깨지 못했다.
호남권은 새누리당이 발 붙이기엔 여전히 요원한 땅임을 입증했다.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의 국민통합 깃발에 매료돼 합류했다는 민주당 출신 한광옥, 김경재씨 등 호남의 중진 정치인들은 선거를 앞두고 이번 만큼은 분위기가 다르다며 호남에서 박 후보가 두자릿 수 지지세를 얻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하지만 이들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호남에서 박 후보는 6.2%(광주시), 7.6%(전남), 10.1%(전북)에 그쳤기 때문이다. 그나마 전북에서 두 자릿수 지지를 얻은 것은 한 가닥 정치변화의 신호로 받아들여 지고 있다.
이번 대선에서 충청권 표심은 어땠는가. 대전은 새누리당 후보 38.1%, 민주통합당 후보 37.9%로 새누리당 박 후보가 이겼지만 박빙 승부였다. 세종시를 포함한 충남에선 새누리당 박 후보 41.0%, 민주통합당 문 후보 31.3%로 새누리당이 앞섰다. 충북은 42.0%, 32.3%로 역시 새누리당 후보가 우세했다.
충청권이 보여준 표심은 의미가 크다. 여당과 제1야당 대선 주자 모두 30%를 넘는 지지를 획득했다. 수도권을 제외한 지방 권역에서 여당후보와 제1야당 후보가 30% 이상 지지받은 곳은 충청과 제주도 뿐이다. 특히 충청권은 대선 뿐 아니라 최근의 총선과 지방선거에서도 여당과 제1야당, 지역기반 정당의 후보자를 골고루 선택해 당선 영광을 안겨준 독특한(?) 지역이다. 영ㆍ호남에선 찾기 어려운 현상이다.
일부에선 이같은 충청권 투표 행태에'배알이 없다', '그러니 핫바지 소리를 듣는다'등의 비판도 내놓는다. 하지만 필자는 선거 때마다 깜짝 놀라게 하는 충청인의 투표 결과를 보면서 '국내 정치 발전을 이끄는 주역'이라고 칭송해 주고 싶다. 더도 덜도 말고 충청권같은 의식있는 정치수준이 전 지역으로 확산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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