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향토사학자 |
윤봉길 의사가 1932년 4월 29일 오전 11시 50분께 일제가 상하이 홍구공원에서 천장절(天長節:일왕 히로히토 생일)과 상해 점령 전승기념 축하행사를 엄숙하게 진행하는 도중 갑자기 단상을 향해 물통 폭탄을 투척해 막대한 피해를 끼쳤다. 실제로 총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 義則)와 상해 일본거류민단장인 가와바타 사다쓰구(河端貞次)는 사망하고, 중국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는 오른쪽 다리가 부러져 절뚝 발이가 되었다.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중장은 왼쪽 다리가 잘렸고, 제3함대 사령관인 노무라(野村吉三郞) 중장은 오른쪽 눈을 잃었다.
이밖에 무라이(村井) 상해 총영사와 토모노(友野) 거류민단 서기장은 중상을 입었다. 그러자 중국 국민당 장개석(蔣介石) 총통은 “중국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했다”고 극찬했고, 이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했다.
그러나 윤봉길 의사는 거사 직후 체포 연행돼 감옥에서 온갖 고초를 겪다가 1932년 12월 19일 금택형무소(金澤刑務所) 교외 삼소우(三小牛) 공병작업장(工兵作業場)에서 잔혹하게 총살돼 25세를 일기로 순국했다. 실제로 일제는 윤봉길 의사의 무릎을 강제로 꿇려 굴욕적인 낮은 자세로 십자가에 붙들어 매고는 눈과 이마를 헝겊으로 가리고 전방 10m 거리에서 딱 한 발의 총알로 이마 정중앙을 명중시켰다. 그러자 윤봉길 의사의 이마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와 헝겊을 붉게 물들이는 바람에 마치 일장기를 그려 놓은 것 같았다.
우리 한민족은 누구나 치욕적인 그 날을 결코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윤봉길 의사는 1908년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아버지 윤황(尹璜)과 어머니 김원상(元祥)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호는 매헌(梅軒)이다. 10세 되던 해인 1918년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다음 해에 3ㆍ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충격을 받아 일제의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고 자퇴했다.
그후 윤봉길 의사는 동생인 윤성의와 함께 한학을 공부했고, 14세 때인 1921년부터는 오치서숙(烏峙書塾) 훈장인 매곡(梅谷) 성주록(成周錄) 선생 문하로 들어가 사서삼경을 배웠다. 문장력이 뛰어나 1923년 오치서숙의 시 대회에서 장원을 했고, 1928년에는 시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1926년에 오치서숙을 졸업하고, 독학으로 국사와 신학문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농민 운동에 관심을 갖고, 오치서숙 동창들과 뜻을 모아 야학을 개설했다. 그는 가난해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농촌의 청소년들에게 한글, 역사, 수학, 과학, 농업 등을 가르치면서 수업의 교재로 '농민독본'을 저술했다.
1929년에는 부흥원(復興院)을 설립하고 인기리에 '토끼와 여우'를 공연했다. 그러자 윤봉길 의사는 일본 경찰의 주목을 받게됐다. 그런 와중에도 윤봉길 의사는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하고, 이를 기반으로 농촌자활운동을 펴나갔다. 그리고 농민들의 건강 증진을 위해 수암체육회(修巖體育會)를 조직했다. 일제의 감시가 점점 더 심해져 활동이 어렵게 되자 윤봉길 의사는 23세 때인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還)' 유서를 남기시고 충의대교(忠義大橋)를 건너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백범(白凡) 김구(九) 선생의 지도하에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해 조국 광복에 크게 기여했다. 그리하여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윤봉길 의사는 문무(文武)를 겸비한 훌륭한 애국지사였다. 그러나 국사교과서에 윤봉길 의사가 상해로 망명하기 전에 향리인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부흥원(復興院)을 설립하고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해 농촌 계몽과 부흥 운동을 활발히 전개한 사실을 외면하고 홍구공원 폭탄투척사건만 간단하게 기록해 아직도 대부분의 대한민국 국민들은 윤봉길 의사를 단지 테러리스트로만 기억하고 있다. 앞으로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사업회가 국사 교과서의 윤봉길 의사 관련 기록을 수정 보완하는데 사업의 최우선 순위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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