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신한 한남대 철학과 교수 |
선거운동 기간이나 선거가 끝난 지금 가장 많이 회자되는 말 가운데 하나는 '국민통합'이다. 두 후보가 표를 얻기 위해서 공히 사용했던 구호였으며 선거에 대한 분석에서도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이다. 이것은 대통령 당선인이 구현해야 할 과제지만 동시에 시민들이 떠안은 새로운 삶의 과제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대립과 분열은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정치적 구호 이전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시민적 삶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훌륭한 정치가는 남보다 앞서 이러한 현실을 파악하고 이를 자신의 정치적 과제로 삼을 줄 아는 사람이다. 정치가가 제시한 구호는 그의 현실파악 능력을 보여줄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시대정신을 가름하는 바로미터가 된다.
국민통합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은 '다름'이다. 다름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나와 다른 사람이 다른 것은 자연스런 것이다. 나의 생각이 다른 사람의 생각과 다를 수 있으며 내가 생각하는 가치가 다른 사람의 그것과 다를 수 있다. 그러므로 다름은 통합의 전제가 아니다. 문제는 다름이 낳는 분열과 대립이다. 다름이 분열과 대립으로 이어지는 것은 다름 사이의 관계에서 나온다. 다름과 다름이 만날 때 분열도 나오고 통합도 나온다. 이번 선거에서 거론된 다름을 나열해 보면 그것은 대개 성별, 세대, 출신지역 등인데 이들은 모두 자연적인 것이다. 그러나 자연적인 것에 정신적인 가치가 덧씌워질 때 자연적 다름은 대립으로 진행한다. 대립과 분열은 결국 정신적 규정에서 나온다. 예컨대 독재 대 민주라는 대립구도에는 엄청난 정신적 가치관이 내재해 있다.
자연상태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성별, 세대, 출신지역이 정신적 가치로서 충돌할 때 국민통합이 요구된다. 정신적 가치와 규정에도 등급이 있다. 예전에 덧씌워졌던 규정만을 오롯이 사용하고 이를 토대로 다른 정신적 규정을 아예 배척하는 단계가 있는가 하면 예전의 것을 넘어서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가는 단계도 있다. 정신적 규정이 단순한 다름을 넘어서 대립과 분열의 단초가 된다면 이는 저급한 것이다. 이에 반해 예전의 다름을 새로운 같음으로 만들 수 있는 높은 단계의 정신적 규정도 있다. 한국병이라고 불리기까지 했던 지역감정은 저급한 단계의 정신적 규정이라면 이를 극복하려는 국민통합은 높은 단계의 정신을 향한 정치적 화두다. 돈 선거가 자취를 감추고 색깔론이 비판받고 지역감정이 퇴색한 것은 우리의 시민정신이 성숙해진 결과다.
국민통합을 위해 필요한 것은 정신적 그릇의 성숙과 더불어 그 속을 채울 콘텐츠다. 정치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도의 정신적 활동이다. 이 활동은 이를 매개하고 떠받치는 내용이 없을 때 쉽게 약육강식과 권모술수가 판치는 권력의 난장판으로 변모할 수 있다. 국민통합은 소외된 지역 사람을 정부 요직에 앉히고 야당 인사를 기용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달성할 수 없다. 통합은 생명체와 같은 유기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유기적인 통합의 이념을 찾아야 한다. 한국인의 뼛속까지 스며들어 있는 유교적 가족 유대로는 부족하다. 이를 보충하고 대신할 새로운 통합의 이념은 결국 종교와 철학에서 찾아져야 한다. 진정한 국민통합은 이를 가능하게 하는 '시민종교'의 이념을 발견하고 적용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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