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찬]민막을 모르시면 하늘이 버리시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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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찬]민막을 모르시면 하늘이 버리시나니

[시론]민찬 대전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승인 2012-12-26 14:55
  • 신문게재 2012-12-27 21면
  • 민찬  대전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민찬 대전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민찬 대전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민찬 대전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창업(創業)과 수성(守成) 중에 어느 것이 더 어려운가?” 어느 날 당태종이 중신들을 모아놓고 의견을 물었다. 창업은 나라를 세우는 일이고 수성은 나라를 지키는 일이다. 아버지를 도와 당 제국을 건설한 당태종으로서는 이제 나라를 경영하는 일에 더 커다란 관심이 모아졌을 법도 하다. 이 말을 대선 국면이 막 지나간 이즈음의 버전으로 표현하자면 창업은 정권을 획득하는 일이고 수성은 그 정권을 유지하는 일이 될 것이다. 당태종의 질문에 방현령은 “창업이 어렵사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곁에 있던 또 하나의 중신 위징이 다른 대답을 하고 나섰다. “아닙니다. 수성이 더욱 어렵사옵니다.” 이에 당태종이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방현령은 오래 전 나를 쫓아 어려움을 극복하고 천하를 평정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창업이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일이다. 위징은 나를 도와 천하의 안정에 진력하였고 오늘도 그 때문에 근심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러니 수성이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생각해보면 창업은 과거의 일이 되었으니 이제는 수성을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당태종과 관련하여 널리 알려진 중국 고사의 내용이다. 당태종은 고구려를 쳐들어온 일로 우리에게는 마뜩찮기는 하나 저 너머 중국에서는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주로 변함없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당태종의 치세를 '정관의 치'라는 말로 따로 일컫기도 하거니와 그의 국가경영방식을 정리해놓은 '정관정요(貞觀政要)'는 대표적인 제왕학의 교본으로 널리 알려졌다. 당태종의 주변에는 방현령, 위징 말고도 두여회 등 뛰어난 신하들이 여러 명 포진하고 있었다.

당태종의 고사가 빈번하게 인용되는 우리의 문학 작품에 '용비어천가'가 있다. '용비어천가'는 1445년 세종 27년에 편찬을 본 장편서사시로서 세종 위의 여섯 대 조상들의 행적을 찬미한 노래로 알려졌다. 총 125장으로 이루어진 '용비어천가'는 앞 대목에 목조, 익조, 도조, 환조 등 추증된 4대 조상들에 얽힌 신이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뒤이어 태조 이성계의 눈부신 행적에 작품 분량의 반을 할애한 다음, 창업에 관여한 태종의 활약상으로 후반부 20장을 엮어놓고 있다.

하지만 '용비어천가'에서 보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110장에서 124장까지 총 스물다섯 장을 차지하고 있는 '무망장(毋忘章)'이 아닌가 싶다. '무망장'은 말 그대로 “이 뜻을 잊지 마소서(此意願毋忘)”로 끝나는 장으로 여기에는 선조들이 고생을 해가며 나라를 세운 소중한 뜻을 잊지 말고 부디 수신에 힘을 쓸 것을 후대의 왕들에게 권면하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또한, 군령의 엄숙함을 잊지 말라는 충고 및 충신과 간신을 구분하라는 충고가 있는가 하면, 인리형제들 사이의 화목을 강조한 대목도 있고 우문(右文)정치의 중요성과 사술(邪術)에 대한 척결을 강조한 대목도 있다. 그렇지만 '무망장' 중에서도 가장 많이 우리의 눈길을 잡아끄는 것은 역시 백성을 모든 치세의 첫머리에 두고 있는 116장의 다음 대목이 아닐까 싶다. “민막을 모르시면 하늘이 버리시나니 이 뜻을 잊지 마소서.” 백성들이 겪는 고통을 외면하면 하늘도 그 임금을 버리게 된다는 이 구절에는 민생을 최우선으로 살펴야 한다는 준열한 하늘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이렇듯 '무망장'에는 임금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상세한 충고들로 채워져 있다. 농사짓는 백성들을 위하여 농법서를 간행하고 측우기를 만드는가 하면 훈민정음까지 창제하여 백성들의 눈과 귀를 틔우도록 해준 세종께서 본래 '용비어천가'를 구상하는 자리에서 '무망장'까지 신하들에게 요구한 것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그렇다 하더라도, 신하들이 새로운 왕조의 무궁함을 염원하고 자신들의 주군이 성군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절대권력의 면전을 향해 거침없이 간언을 토해내고 있다는 사실은 흔한 일이 아니다.

따라서 '무망장'이 있는 한 '용비어천가'를 단순히 찬미의 문학, 아첨의 문학으로 규정짓는 것은 온당한 평가라고 할 수 없다. 거기에는 '정관정요'에 뒤지지 않는 이른바 정치에 대한 흔들림 없는 요체가 담겨 있다고 보아 마땅하다. 백성들의 삶을 생각하는 임금과 그 주위에 지켜보는 신하들이 있었다는 사실, 거듭 말하건대 창업도 어렵지만 수성은 더더욱 어려운 법이다. 대통령 당선자의 행보가 수성을 위한 첫걸음이 될 수 있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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