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재권 한국은행 대전ㆍ충남본부장 |
최근 연 2%대 성장률이 현실화되자 고도성장에 익숙한 국민의 충격은 대단히 크다. 지난해 말까지만 해도 유럽 재정위기의 재연에도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가 어느 정도 남아있었다. 이에 많은 경제전문가는 올해 성장 패턴을 '상저하고' 즉 상반기까지 저조할지라도 하반기에 들어 회복세로 반등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하반기 들어서도 크게 나아지지 않자 '상저하중'이라는 표현이 사용되다가 3/4분기 성장률 발표 이후에는 '상저하저'도 아닌 '상저하추(락)'라는 표현마저 나왔다. 요즘 “조만간 나아질 것이다”라는 희망적인 전망보다 “내년에도 쉽게 반등하기 어렵고 어쩌면 어려움이 상당기간 지속될 수도 있다”는 아주 비관적인 이야기도 자주 접한다.
부동산시장 침체가 지속되면서 곳곳에서 서민들의 안타까운 '깡통 아파트' 사연들이 전해진다. 이제는 억대 연봉자가 가계부채의 무거운 이자 부담을 견디지 못해 법원에 개인회생을 신청했다는 뉴스마저 전해지고 있고, 생활고를 못 이긴 노부부나 모녀의 동반 자살 소식이 더 이상 놀랍지 않은 상황이다. 그간 호시절을 구가했던 금융권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조(兆) 단위의 막대한 이익을 올리던 은행권의 수지규모가 지난해에 비해 반토막났고 서민금융기관들의 연체율이 크게 상승하고 있어, 가계부문의 부실이 점차 금융기관 부실로 확산되고 있는 듯하다.
게다가 주요 선진국의 경기 회복도 기대하기 어렵다. 각국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5년째 중앙은행의 발권력까지 동원한 강력한 정책대응을 다양하게 실행했지만, 나아진 곳은 별로 없다. 이달 중순 미국 Fed는 실업률이 6.5%까지 낮아질 때까지 초저금리 기조를 지속하겠다는 사상 초유의 실험적 정책을 발표했지만, 시장의 기대와 반응은 신통찮다.
이와 같은 대내외 상황 전개는 나름 선방하고 있다는 우리 경제도 이제는 전 세계적 경기 흐름에서 예외가 되기 어렵다는 인식을 갖게 한다. 가계 기업 등 모든 경제주체들의 심리가 꽁꽁 얼어붙었다. 통상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높아지면 경제주체들의 자신감이 약화되고 소비, 투자심리가 약화되면서 경제활동이 전반적으로 위축된다. 엄밀하게 얘기하면 '어려워질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걱정이 아닌 '경제난이 상당기간 지속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공포에 사회 분위기가 휩싸여 있는 듯하다.
이로 인한 부작용이 심각하다. 창조적 파괴를 통해 경제 난국을 극복하는데 최선봉 역할을 해야 할 기업들이 생산적 투자보다는 '현금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불황의 골이 깊어지고 그 끝을 헤아리기 힘든 국면이 지속되자 생존차원에서 유동성 확보에 급급하고 있는 것이다. 재계에서는 '머뭇거리다가는 제2의 웅진이 될 수도 있다'는 공포감이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업종을 불문하고 장기 불황을 견딜 수 있는 몸집과 재무구조를 갖추기 위해 서둘러 이익이 나지 않는 사업을 정리하고 중복계열사들은 합병시키며 심지어 핵심계열사도 매각하는 실정이다.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 처절한 투쟁을 하고 있다. 하지만, 상기와 같은 생존전략은 일본의 장기 불황에서 확인됐듯, 불황기간만 늘릴 뿐 근본적인 치유방법이 될 수 없다. 주요국에서 추진되고 있는 다양한 정책이 무력한 상황이기에, 솔직히 마땅한 대안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정부 주도의 적극적인 경기부양책을 실시하는 케인즈의 처방보다는 혁신을 통한 창조적 파괴를 지향하는 슘페터의 방식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한 '불황을 호황을 준비하는 과정', 즉 건강에 좋은 냉수마찰로 보는 시각도 새롭게 재평가해 볼 필요가 있다. 재정적자 확대 등 부작용만 결과적으로 누적시키는 정책 남용보다는 오히려 경제의 자율적 조정기능을 믿고 차분하게 긴 호흡으로 접근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물론 어떤 상황에서도 기업의 끊임없는 창조적 도전은 이루어져야 한다.
향후 도래할 미래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지금은 어렵지만 조금만 참고 지내면 경제상황이 나아질 것이라는 긍정적인 태도”가 중요하다. “불황속에서 호황의 그림자가 찾아온다”라는 평범한 얘기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또한, 우리 경제에 1980년대 후반에 예상치 않게 도래했던 3저 호황 때와 같은 급격한 여건 변화가 찾아올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언젠가는 찾아올 호황을 차분하게 긴 호흡으로 기다릴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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