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채훈 대전마케팅공사 사장 |
부임 후, 한달 간은 거의 매일 비가 내려 우중충한 것으로 유명한 런던의 기후를 지겹도록 경험하였다. 부활절이 지나고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의 어느날, 출근길, 싸구려이긴 하지만 난생 처음 개인 소유의 차로 출근하던 첫 날이었다. 그 전까지는 기차와 지하철로 출퇴근했다.
그런데 길이 생소해서 잠깐 한눈판 사이에 앞 차의 뒷 면을 들이받았다. 내 차의 헤드라이트는 깨져 있었고, 앞 차의 뒤 범퍼는 움푹 패어 있었다. 앞 차는 당시 영국에서 생산되는 차 중에서 롤스로이스를 제외하고는 가장 고급차종인 재규어였다. 차를 세우고 앞 차 운전자가 내 차로 왔다. 필자도 내려서 사과부터 했다. 그는 나더러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물었고 나는 한국에서 왔다, 온 지 얼마 안돼서 길이 서툴러서 그랬다, 바로 보험처리를 하겠다고 했다.
그는 뜻밖에도 웃으면서 “외국에서 왔으니 적응할 기회를 주겠다, 런던 생활을 즐기기 바란다”고 말하고 그대로 유유히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당시만 해도 서울에서 접촉사고가 나면 길거리에서 서로 멱살을 잡던 모습을 심심치 않게 봐왔던 필자로서는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떠나는 그의 뒷 모습을 보며 필자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대는 대영제국의 신민이 될 만하다. 재규어를 소유할 만하다”라고.
잉글랜드 남부 해안가에 브라이튼이라는 항구도시가 있다. 그 곳의 한 조선업체에서 주영 한국대사 내외를 초대해서 선박건조 현장을 둘러보고 정박중인 조그만 유람선에서 만찬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하였다. 추운 겨울 눈발이 휘날리는 가운데, 부두와 선박을 연결하는 다리가 미끄러워서 대사부인이 아래로 떨어지는 대형사고가 발생했다. 곧바로 바다로 뛰어든 사람은 다름아닌 그 회사 사장이었다. 바로 구조가 됐고 나중에 한인사회에서 두고두고 화제가 되었다.
초청받은 인사가 위험한 사고에 직면하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바다에 뛰어든 그 회사 사장은 이튼스쿨과 옥스퍼드 출신의 CEO였다. 영국 명문학교는 공부를 잘 해야 가는 것이 아니다. 학문적 소양은 기본이고 리더십과 팀워크, 희생정신, 상류사회 일원으로서의 사회적 책임감을 최고의 덕목과 가치로 가르친다. 진정한 지도자를 양성하는 곳이다.
세계화가 진전되고 세계경제가 통합의 길로 들어서면서 기업간 무한경쟁이 보편화된 지도 20여년이 넘었다. “1등 기업만이 살아남는다”, “승자 독식시대에서 2등이 설 곳은 없다”는 기업경영방식이 한 시대를 풍미했다. 아니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에토스에 동의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 지상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한 지적이 자본주의의 꽃을 활짝 피운 미국에서 제기되기 시작했다는 것도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화두가 되고 있는 경제민주화라는 말도 이러한 자본주의의 이율배반을 지적하고 개선하기 위한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공감대에서 비롯된 용어일 것이다. 대기업의 독식과 이로 인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건강한 사회, 시장경제 체제의 선순환을 위해서도 반드시 시정되어야 할 과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를 개선하기 위한 법률이나 제도의 도입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사회에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이 자리잡는 일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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