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미애 금강대 영어통번역학과 교수 |
의미론 학자 몬테규(Montague)는 '아무개'라는 특정개체의 의미는 '그 사람이 가진 속성들의 집합'이라 했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가진 속성들의 집합'이 된다. 그럴듯하다. 그러나 때로는 내가 가진 속성들이 무엇인지 모르는데, 그리고 때로는 그 속성들에 대한 내 생각이 그릇되거나 왜곡된 마음 틀 속에서 굴절되어 있을 진데, 그게 정말 '나'이고 '너'일까? 뭔가 좀 부족하다. 그렇다면 '자아'란 타인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영향을 받는다(I am not what I think I am and I am not what you think I am; I am what I think that you think I am)고 말하는 쿨리(Cooley)의 거울자아(looking-glass self)가 더 적절할 것인가? 아니면 울프(Gary Wolf)의 수량적 자아(quantitative self)로 건너가야 할까.
그래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자아에 대한 질문이 '나'를 어떠한 '나'로, 나아가 '사회'를 어떠한 '사회'로 만들어 가는가.
아마도 우리의 삶과 생각이 단순해져서 일상번뇌가 극히 줄어들지 않을까. 모든 중심이 마음으로 흐를 것이니, 물질적인 '세속주의'에서 멀어질 것이지 않을까. 노스페이스 마크가 등과 어깨에 붙었다고, 샤넬백을 살랑살랑 흔든다고 '참 나(true self)'를 찾는 데 도움이 되겠는가.
나를 찾아가는 일에 애쓰다 보면 아마도 법륜스님이 말씀하신 '자기 생존에 대한 책임'도 갖게 될 것이라 믿는다. '내가 누구인가'를 찾아가는 어른이라면 생활에 대해 자립을 할 것이므로 미성년의 단계를 벗어나 스스로 먹고살 것을 책임질 것이고, 나와 생물학적으로, 사회학적으로 얽혀 있는 여러 관계와도 기꺼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과거와 현재, 미래가 얽혀 있으니 나를 존재하게 해 준 가족과 사회에 소홀할 수 없으며 지금 이 순간을 자신이 주체가 되어 살아가고 있음을 자각하여 성실해 질 수밖에 없으며, 나와 나의 연결존재들의 미래 꿈과 행복을 위한 소원을 이루도록 노력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언젠가 큰스님을 뵈었다. '마음으로 보라'고 하셨다. 내 생각을 가늠하셨나 했다. '마음으로 보는 일', 아마도 올 한 해를 돌아보며, 또 다가오는 새해를 맞으며 그것을 훈련하는 하루하루이길 바란다.
헨리 제임스(Henry James)는 말한다. “있는 힘껏 살아라. 그렇게 살지 않는 것은 잘못이다…. 자신의 인생을 가졌거늘 도대체 무엇을 더 가지려 하는가. 잃게 되어 있는 것은 잃는 법이다. 아직 운이 좋아 인생을 더 살아갈 수 있다면 모든 순간이 기회다…,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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