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웅순 중부대 교수 |
어머니라는 말만 들어도 눈물이 글썽글썽해진다. 어머니의 존재는 그렇게 누구에게나 서럽고 애틋하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한집에서 반세기를 살았다. 50년 전 초가집에서 만나 50년 후 아파트에서 이별했다.
어머니는 집안 살림에 남편 뒷바라지, 자식 뒷바라지가 전부였다. 하고 싶은 것들이 얼마나 많았을까만, 일생 어머니는 있었지만, 어머니 자신은 없었다. 이것이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모시삼고, 밭일하고, 빨래하고, 밥하고, 설거지하고 이런 것들이 어머니 일상의 전부였다.
어머니는 생전 아프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은 줄 알았다. 내색하지도 않았고 내색할 틈도 없었다. 바람이 부는 줄도 몰랐고 물이 고이는 줄도 몰랐다. 물결이 이는 줄도 몰랐다.
가신 후에야 가슴에서 파도가 치는 것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시를 쓰는 일이었다. 기도하듯 시를 쓰는 일이었다. 강물 위에 배가 될 때까지 하나, 둘 풀잎을 띄워 보내는 일이었다.
고독한 것들은 항상 가까이에 있고 그리운 것들은 늘 멀리에 있었다. 어머니는 그곳에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그러다 어느 날 겨울 울음이 아닌 것들, 겨울 달빛이 아닌 것들을 홀연 곁에 놓고 떠나셨다. 불빛이 생기기 시작한 것도 그때쯤이었고 그림자가 생기기 시작한 것도 그때쯤이었다.
산녘에는 초승달이 떴다.
“참, 예쁘구나.”
어머니는 일손을 놓고 들깻잎 새로 초승달을 바라보았다. 흰 구름도 지우고 먼 하늘도 지웠다. 나뭇가지에 걸린 초승달이 바람 불면 마지막 잎새처럼 툭 떨어질 것만 같았다.
어둑어둑해서야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왔다. 가도 가도 닿을 수 없는 그리움. 영원으로 소멸해간 아픈 생각들이 이제는 내 이순의 산모롱가에 초승달로 뜨고 있다.
늦가을/ 잎새 하나/ 천년으로/ 지고 있다// 물빛도 스쳐가고/ 불빛도 스쳐가고// 불이문/ 끊어진 길을/ 초승달이/ 가고 있다
-필자의 '어머니' 37
이보다 더 먼 곳이 세상천지 어디에 있을까. 바람이 바람이 아니라서 눈발이 눈발이 아니라서 산을 넘지 못하고 강을 건너지 못하는 미련들. 바람과 눈발을 맞으며 가슴으로 깊어간 외로움들을 어머니는 어찌 감내하면서 살았을 것인가. 세월 어디쯤서 자취 없이 잦아들고 녹아들었을 겨울바람과 눈발들. 빙점의 길가에서도 해마다 달개비, 씀바귀, 구절초, 산국들이 피고 지지 않는가.
생각도 만추가 되면 붉게도 물드는가. 떠나지도 못한 것들 울지도 못한 것들이 우수수 낙엽이 되어 빈칸으로 떨어진다. 닿지 말았어야 할 설움들이, 닿지 말았어야 할 가슴에 비수 같은 생채기를 내며 혜성처럼 스쳐간다.
어머니가 가신지 십 년도 넘었다. 엊그제 같은데 세월이 그렇게 흘렀다. 그날은 눈이 유난히도 많이 내렸다. 추한 것들, 더러운 것들 다 덮고 떠난 겨울바람. 하얀 눈길을 따라 발자국 소리 하나, 바람 소리 하나 남기지 않고 떠났다.
겨울의 산과 들은 참으로 아름답다. 잎을 떨구고 가을걷이가 끝난 저 텅 빈 산과 들은 얼마나 평화롭고 고요한가. 겨울 빗소리, 겨울바람 소리가 스쳐 지나가는 산과 들. 저녁 햇살과 새벽 달빛이 잠깐 왔다가는 산과 들. 그런 고독이 없다면 산과 들은 얼마나 외로울 것인가. 그런 적막이 없다면 겨울은 또 얼마나 허전할 것인가.
눈 감으면 고즈넉 흔들리는 어머니의 불빛. 그것은 어머니가 내게 주고 간 영원한 그리움이며 안식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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