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로골퍼 박세리와 함께 한 강민구 명예회장. |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그에게 뜻밖의 기회가 찾아온 것은 한국전쟁 직후였다. 전후 가장 중요한 일은 국가재건이었다. 강 명예회장이 최인규 전 내무부장관에게 발탁된 것도 이때 쯤이다. 당시 국가의 모든 일은 사실상 내무부가 관장했다. 강 명예회장이 내무부 총무과장 시절, 서울대 행정대학원 설립을 주도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3ㆍ15 부정선거로 촉발된 4ㆍ19혁명으로 하야하면서 강 명예회장의 인생도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강 명예회장도 공직을 떠난다. 이후 동양물산기업, 극동휠타공업 대표를 지냈다. 한국유니백부사장을 거쳐 한국슬래트(현 벽산)와 한국건업(현 벽산건설)을 설립한다.
물론, 두 회사의 실질적인 경영자는 김인득 단성사와 중앙극장 대표다. 공직에 있을 때 맺은 인연으로 강 명예회장은 두 회사의 주주로 참여해 사장을 맡았다.
경영인으로 한창 이름을 날리던 강 명예회장이 골프에 눈을 뜨게 된 건 서정화 충남지사를 만난 후부터다. 물론, 경영인으로서 일본인들과의 교제를 위해 비즈니스 목적으로 골프채를 잡았었다.
하지만, 내무부 후배인 서정화 지사가 “비스켓(슬래트) 만들지 말고, 골프장을 해봐라”고 권유하면서 유성컨트리클럽으로 강 명예회장을 데려 온 것이다.
당시 유성컨트리클럽은 건설 도중 부도가 난 상태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권유로 박 전 대통령과 대구사범학교 동기인 유봉선 특수금속 회장이 사업에 착수해 9홀까지 공사를 하다가 갑자기 사망해 멈춘 상태였다.
처음엔 손사래를 쳤지만, 벽산의 김인득 회장에게 서 지사의 얘기를 전했다. 김 회장은 당시 허정구 남서울CC 회장에게 자문을 구한 후 강 명예회장에게 한 번 해보라고 했다.
결정적으로 골프장을 인수하게 된 것은 부인(김정희) 덕분이었다.
제일은행이 주관한 유성골프장 경매에서 부인이 당시 돈으로 3억7500만원에 낙찰받은 것이다. 물론, 강 명예회장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경매는 받았지만, 막막했다. 우선 멈춘 공사를 재가동하기 위해선 현금이 필요했다. 그래서 김인득 벽산 회장과 이인표 에스콰이어 회장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두 회장의 지분 참여를 이끌어냈다.
1975년 유성관광(주)을 설립하고, 이듬해인 1976년 유성골프장은 문을 열게 됐다. 충청권 최초이며, 전국에서 열 번째 골프장이 탄생한 것이다.
▲ 강형모<왼쪽 사진> 대전골프협회장과 강은모 유성CC 대표. |
대전골프협회장이자, 한국골프장경영협회 대전ㆍ충청지역 회장인 강 회장은 내년부터 대한골프협회 상근부회장도 맡아 본격적으로 한국 골프를 진두지휘하게 된다.
사실 강 회장은 국가대표 상비군 출신이다. 10살 때부터 골프를 배웠다. 골프를 배울 수 있는 여건이 좋아 눈을 일찍 떴다. 강 회장의 골프사랑은 남다르다. 매년 10회 정도는 국가대표팀을 데리고 훈련과 시합 등을 위해 해외에 나간다. 그러면서도 국내 라운딩 수는 300회는 될 정도다. 거의 매일 18홀 또는 36홀 골프를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월이 흘러 과거 만큼의 기량은 아니지만, 지금도 강 회장은 이븐파 실력을, 동생 강은모 대표는 80대 초반의 실력을 자랑한다.
강 대표는 “골프는 가장 오랫동안 할 수 있는 스포츠다. 80대 중ㆍ후반까지도 즐길 수 있는 스포츠”라고 말한다. 특히, 정신적인 면과 육체적인 면을 조화롭게 향상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강 대표는 골프를 최고의 운동으로 꼽는다.
할아버지에서부터 아버지, 손주에 이르기까지 공통의 대화 주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강 대표는 “골프는 하나의 클럽문화로 발전돼야 한다. 골프는 귀족스포츠도 아니지만, 솔직히 대중스포츠도 아니다”고 전제 한 뒤 “은퇴자들의 클럽 문화 활성화 차원에서 골프는 매력적 스포츠”라고 말했다.
그는 진정한 의미의 퍼블릭(파 3, 파 6 등) 코스를 만들어 요금 부담 때문에 골프를 하지 않는 분들과 건강관리 프로그램을 가미한 시니어 계층을 대상으로 한 골프장 신설을 계획중이다.
오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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