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병원 국립대전현충원장 |
서정우 하사의 묘비 상석에는 어머니가 유품으로 보관하고 있던 전역 모자가 쓸쓸하게 비바람을 맞고 있다. 그 모자는 아들과 함께 했던 해병대원들이 서정우 하사의 목비 위에 씌워 놓은 것이었다.
문광욱 일병의 묘소에는 전우들과 함께 찍었던 사진 한 장이 빛바랜 채 놓여 있다. 그 위로 어머니의 눈물처럼 빗방울이 쉴 새 없이 흘러내린다. 두 해병대원의 묘소에 꽂혀 있는 무궁화 조화와 태극기도 빗물에 젖어 있다. 전사 전날인 2010년 11월 22일, 전역을 한 달 앞둔 서 하사(22살)의 미니 홈피에는 '내일 날씨가 안 좋다던데 배가 꼭 뜨길 기도한다'는 애절한 글이 올라와 있었다.
또한 문 일병은 친구 미니 홈피에 '한솔아 한반도 평화는 내가 지킨다'고 군인으로서의 각오를 새롭게 다지는 글을 남겨 읽는 사람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다음 날, 서 하사는 마지막 병장 휴가를 맞아 인천으로 나가고자 연평도선착장에서 여객선에 탑승하다 북한의 도발에 의해 포탄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 부대로 복귀하던 중 포탄에 맞아 전사했다.
문 일병은 가장 먼저 달려나가 전투준비를 하려다 파편을 맞아 병원으로 이송되던 중 숨을 거뒀다.
이날 연평도에 북한군이 발사한 무수한 포탄에 서 하사와 문 일병 외에 10여명의 해병대원이 중경상을 입었고 민간인 2명 사망, 3명이 부상을 입었다.
주택들은 검게 그을리고 구멍 뚫린 채 무너져 내렸으며 차량은 뼈대만 남은 채 불타고 있었다. 주민들은 언제 또 공격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한동안 삶의 터전을 버리고 피란을 떠나야 했다.
작년 11월초, 묘역에서 문 일병의 아버지를 뵌 적이 있다.
아버지는 “지금도 어딘가에 광욱이가 살아있는 것 같다. 만약 살아만 온다면 죽을 때까지 업고 다니겠다”며 석양이 지는 묘역에 서서 뼈가 시리게 부는 바람을 맞으며 차가운 비석처럼 한참을 서 계셨다. 또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아들을 보러 오지 않으면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다. 나에게는 과거의 사건이 아니다. 아들만 차가운 땅속에 홀로 두고 갈 때면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며 눈물을 흘렸다. 마치 살아있는 아들에게 말하듯 “광욱아! 다음 주에 또 올게”하고 약속하며 발길을 돌렸다.
자식을 가슴에 묻은 아버지의 슬픈 희망처럼 연평도 포격도발 이후 우리의 안보의식은 깊은 잠에서 기지개를 켰다.
국민은 TV와 인터넷을 통해 전쟁의 단면을 생생히 목격했으며 북한의 무자비한 도발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후 해병대 지원율이 약 2배나 늘어났다. 북한과 마주하고 있는 대한민국 최북단 연평도에서 국가와 국민을 위해 싸우다 전사한 두 해병대원과 부상을 당해 아직도 힘들어하고 있을 이 땅의 해병대원들에게 진심으로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한다. 또한 자식을 향한 그리움으로 하루하루 눈물로 보내는 유가족에게도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연평도 포격도발 전사장병 안장식을 거행한 후, 두 해병대원의 묘소에 학생과 군인들의 발길이 이어져 잔디가 잘 자라지 못했었다. 그러나 지금 그 묘소 앞에 자라난 푸른 잔디가 참 야속하기만 하다.
11월 23일은 연평도 포격도발 2주기다. 11월이 지나기 전 아이들과 함께 국립대전현충원에 방문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짧은 생을 살다간 젊은 용사의 제단에 헌화 한 송이를 바쳐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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