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재권 한국은행 대전·충남본부장 |
그러나 하반기 들어 경기둔화가 가속화 되면서 3분기 성장률이 1.6%에 그쳤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우리 경제도 일본 등 일부 선진국들처럼 경기침체가 장기화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다. 특히 1인당 소득이 2007년 처음으로 2만달러를 기록한 이래 6년째 2만달러 초반에 머물러 있어, “중진국 함정에 빠지는 것은 아닌가”하는 우려도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다.
'중진국 함정(middle income countries trap)'이란 용어는 통상 1인당 소득이 1만2000달러 수준까지 성장했다가 장기간 둔화 또는 정체되는 현상을 의미하며 우리나라는 중진국 함정을 가장 성공적으로 극복한 모범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따라서,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은 '중진국 함정'보다는 '2만달러 함정'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하지만, 2만달러 수준에서 성장이 정체되는 현상이나 1만달러 수준에서 성장이 정체되는 현상이나 우려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역사적으로도 중진국 함정에 빠져 경제발전 단계가 후퇴한 나라는 생각보다 많다. 대표적인 사례로 1970년대 초반까지 잘 나가다가 정체에 빠졌던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등 몇몇 중남미 국가들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아직도 성장정체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학자들은 이들 국가가 중진국 함정에 빠지게 된 원인을 대체로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지 못한 가운데 빈부격차 확대 문제와 인플레이션 등이 일정 시점에서 사회적 갈등으로 표출되면서 성장이 정체됐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요즘 대선 주자들의 정책 공약이 연이어 발표되고 있다. 그간 경제민주화, 복지를 주로 언급했던 여·야 유력 대선후보들이 최근 경제상황 악화로 성장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정책기조를 선회하고 있다. 하지만, 부동산시장 침체 장기화, 1000조원에 육박하는 가계부채 문제의 해결책이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2%대의 저성장 기조가 고착화될 수도 있다는 우려를 불식시키기는 쉽지 않다.
사실 부동산시장 침체는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며 가계부채 문제는 근본적으로 채무자의 상환능력 개선에 달렸다. 일시적으로 빚을 탕감해 주고 이자 부담을 덜어주는 정책 대안은 효과가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가장 바람직한 해결방안은 소득증대가 가능한 지속적인 고성장이지만 현재로서는 이를 기대하기 어렵다. 더구나 일부 선진국처럼 경기침체 장기화에 디플레이션마저 동반된다면 일본식 장기불황의 악순환 고리에 빠질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구체적인 해법을 내로라하는 저명한 경제학자들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우리와 같은 신흥시장국은 선진국에서 풀린 막대한 유동성이 밀려오면서 환율이 절상되고, 원자재가격 상승 등으로 물가상승 압력도 가중되고 있다. 정책당국 입장으로서는 곤혹스럽기 그지없다.
그렇다면 현재 상황에서 가장 효과적인 대처방안은 무엇일까? “한 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울 정도로 불확실성이 클 경우 기본에 충실한 정책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한다. 필자는 현재와 같이 성장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이 마땅치 않은 경우에는 중장기 성장기반을 공고히 하는 물가안정 노력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그간 물가안정이라고 하면 인플레이션 억제로만 인식되어 왔지만, 최근에는 디플레이션 방지책도 포함되고 있다. 현재 미국 유럽 등에서 추구하는 통화정책의 핵심은 2~3%대의 인플레이션을 달성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경제성장과 물가안정은 상충되는 목표가 아니라 중장기적으로 양립 가능한 목표로 삼고 경제정책을 수행하는 것이다. 차기 우리 경제를 이끌어갈 비전을 제시하고 있는 각 대선캠프에서도 새로운 성장 동력 창출에 대한 고민 못지않게 물가안정을 통한 중장기 성장기반 확충 노력이 중요하다는 점을 깊이 인식하고, 물가안정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주요 공약에 담아내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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