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스락 광장에 올라서면 350년 느티나무와 마주하게 된다. 이곳에 서서 바라보는 일몰.일출은 장관이다. |
성흥산 (260m) *위치:부여군 임천면 군사리, 장암면 지토리
임천은 원래 백제에서는 가림군(加林郡), 신라에서는 가림군(嘉林郡)이었다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성흥산성은 원래 백제의 가림성(加林城)으로 백제의 서울인 사비도성을 지키기 위하여 백제 동성왕 23년(501년)에 쌓은 성이라 한다. 성흥산은 금강 하류 지역의 지세로 볼 때 군사적으로 중요한 자리다. 성흥산성은 이 성흥산에 테메식(머리띠식)으로 쌓여져 있다. 옥천 대전 연기 등 백제와 신라 경계 지역에 수 많은 성터가 있고 그 밖에도 백제시대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성이 많다.
그러나 그 이름과 성을 쌓은 연대가 밝혀져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이 성흥성은 이름과 쌓은 시기가 분명하게 밝혀져 있어 주목된다. 삼국사기에는 가림성으로 나와 있으나 세종지리지에는 성흥산성으로 나와 있기 때문에 고려 때부터 성흥산으로 불려지고 있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하고 있다. 성흥(聖興)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러나 '성흥산성'은 백제의 산성으로 많은 기록이 있으며 전하는 이야기도 많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임천현 편 형승 란에 '수륙의 요충지이다. 당나라 유인원이 손인사와 더불어 부여풍(扶餘豊)을 공격할 때 모든 장수와 의논하매, 어느 장수가 말하기를 “가림성은 수륙의 요충이므로 마땅히 이를 먼저 공격하여야 한다” 하니, 유인궤가 말하기를 “병법에 이르기를 실한 곳을 피하고 허한 곳을 치라 하였다. 가림성은 험준하고 견고하니 이를 치려면 군사의 손상을 볼 것이요 대치하고 있으려면 오랜 시일이 소요될 것이다” 하여 드디어 주류성으로 달려갔다' 라는 내용이 있다.
구당서(舊唐書) 유인궤 전에는 더 자세히 '백제 부흥운동이 있을 때 백제 부흥군에 내분이 있음을 알고 당군이 수륙 양면으로 주류성을 공격하게 되었는데 이 때 신라는 문무왕이 친히 김유신 등 28 장군(혹은 30 장군)을 거느리고 663년 7월 17일에 출발하여 웅진에서 당나라 유인원군과 합세했다' 는 내용이 위의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내용 앞에 적혀있는 모양이었다.
위의 내용으로 볼 때 당시의 성흥산성은 매우 견고한 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둘레가 2705척, 높이 13척의 석성으로 성안에 우물 3 곳과 군창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석축산성의 길이는 약 1200m, 높이는 약 3~4m 정도이고 서남 벽의 보존상태가 좋은 형편이다. 안으로 내탁하고 바깥만 돌을 이용하여 쌓여져 있다. 성문 터는 남문 동문 북문이 확인 되고 있다. 산성의 고스락 부분은 약 2000㎡의 평지가 있다. 이곳에 장대와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산성의 동벽 내부에 우물이 있다. 이 우물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 보물 제 217호인 대륵사 석조미륵보살입상. |
성흥산 남쪽 중턱에 원통보전 용화보전 석탑 등이 있는 대조사가 있다. 중간에 폐사 되었으나 임천군 옛 관아 건물의 목재를 써서 중건하였다 한다. '대조사 미륵실기'의 기록에 의하면 백제의 도승 겸익이 인도국의 상가나대진사에서 5년간 공부하고 범문(梵文)에 통달하고 아운장 5부 전문을 가져다가 72권의 번역, 책을 만들어 흥륜사에 두었다. 어느 날 꿈에 관음보살이 손에 광명주를 들고 나타나 역본이 잘 되었다고 칭찬하는데 어느덧 그 보살이 대조(大鳥-큰 새)로 변해 날아가 가림성 위에 와서 없어졌다.
꿈에서 깨어 새가 앉은 곳을 찾아보니 바위 위에 관음보살이 앉아 있었다. 그래서 석불을 만든 것이 지금 대조사 뒤편에 있는 석조미륵보살입상이고 절 이름을 대조사라 했다는 것이다. 대조사의 창건 연대는 미륵실기에 백제 성왕 5년(527년)에 시작하여 완성했다고 한다. 이 연대는 백제의 서울이 웅진(공주)에 있을 때다. 미륵석불은 고려시대에 많은 거불이며 관촉사의 관음보살과 조각 수법 형태가 거의 같아 미륵실기에 나오는 고려 원종(1259-1274) 때에 무량사 승 진전장로가 불상을 중수하였다는 해를, 석불을 만든 연대로 보는 것이 옳을 것으로 생각된다는 것이다. 이 석조미륵보살입상은 보물 제 217호이다.
▲성흥산의 경관
성흥산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작고 아담하며 아름다운 산이다. 사방이 가파른 비탈을 이루고 있지만 숲이 무성하고 기암들도 많다. 특히 주차장 위 충혼사 옆은 우람한 바위가 낙락장송과 어울려 높은 벼랑을 이루고 있어 장관이다. 고스락에 오르려면 그 우람한 바위 사이를 지나야 한다. 바위에 오르면 조망이 시원하고 좋다. 고스락을 이루고 있는 평지에서의 조망도 훌륭하다. 백마강과 부여 논산 강경 익산 일대가 조망되고 사방으로 펼쳐진 넓은 들도 보인다. 여기에 성흥루도 있다. 또 고스락 광장에 올라서면 첫머리에 수령 350년이라는 크나큰 느티나무(자연보호수)가 있다. 매우 큰 나무여서 멀리에서 볼 수 있는 멋진 나무다. 매년 이 느티나무 일대 광장에서 해돋이 축제가 열린다 한다. 성흥산 자락에 있는 임천면사무소 바로 옆에도 수령 350년의 아름다운 소나무(자연 보호수)가 있다. 산 위에 큰 느티나무 산자락에 큰 노송, 이 두 나무가 성흥산의 경관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 챙겨보기-대조사의 미륵석불
대조사는 성흥산의 남쪽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성흥산을 오르는 길에서 오른 편으로 갈라져 나가는 길로 무성한 소나무 ?을 지나가면 대조사가 나온다. 성흥산을 오르다 옆길로 빠져 40여분이 걸리는데다 대조사를 흔한 보통 절로 알기 때문에 대조사를 외면하기 쉽다.
그러나 특별한 내력과 전설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조사의 미륵석불은 논산의 은진 미륵과 같은 고려시대의 거불 양식이어서 뜻이 있다. 그리고 이 미륵불은 성흥산에서 유일한 국가 지정 보물이기도 하다. 시간과 걷는 품이 좀 들어도 대조사에 들러볼 것을 권한다.
▲홀로 자동차로 오른 성흥산
서천에서 자고 아침 일찍 월명산에 올라 한 바퀴 돈 다음 29번 국도를 따라 부여 쪽으로 가다 임천에 들렀다. 우선 점심을 먹고 난 다음 임천면사무소에 들러 성흥산에 관한 자료를 얻으려 했으나 별 도움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여기서 고스락 들머리에 있는 충혼사와 대조사까지 차로 오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면사무소 바로 앞에 있는 찻길에 들어섰다. 한참을 오르니 대조사 안내판이 보였다. 오른 편으로 갈라져 나간 대조사 길은 무성한 소나무 숲을 지난다. 대조사는 자그마한 절이었고 보물 217호인 미륵석불은 절 뒤 언덕 위에 있다. 차를 돌려 다시 갈림길을 지나 충혼사 쪽으로 오르는 도중 잘 복원된 산성이 보이는 곳에서 잠시 멈춰 산성을 훑어보고 사진도 찍었다. 충혼사에 이르니 넓은 주차장도 있고 매점 화장실 등도 있었다.
여기서 큰 느티나무가 있는 언덕까지 오르는 길은 좌우에 기암괴봉이 늘어선 별천지였다. 마치 설악산의 어느 골짜기에 들어선 것 같았다. 느티나무서부터 넓은 터를 지나 유금필 장군의 사당을 거쳐 더 오르면 고스락에 이른다. 고스륵에는 정자가 있고 작은 숲이 있다. 고스락의 남 쪽 모서리에 서니 금강과 넓은 들이 조망되어 시원했다. 고스락에서 되짚어 내려와 충혼사에 들러 머리 숙여 예를 드린 다음 하산 길에 들어섰다.
▲산 길
산길은 비교적 단순하다. 면사무소 앞을 지나는 차도가 산성 바로 아래 충혼사 주차장까지 올라가고 있다. 이 차도는 도중에 대조사로 갈라져 나가기도 한다. 물론 찻길을 따라 올라갈 수 있다. 면사무(차도) 길:면사무소~대조사~주차장~고스락 약 1시간 30분. 덕고개(약수터)길:덕고개~(등성이)~주차장~느티나무-고스락(약 3.5㎞) 약 1시간 30분. 한고개 길:한고개~(등성이)~고스락 (약 1.4㎞) 약 40분
▲교 통
부여 서천 사이 29번 국도 변에 있기 때문에 교통이 좋다. 군내버스가 30분 간격으로 지나고 있고 직행버스도 자주 지난다.
▲조 망
북→칠갑산 구절산 무성산 성화산 국사봉 계룡산 국사봉 금수봉 향적산 동→대둔산 작봉산 천호산 미륵산 남→천방산 희리산 희리산 장태봉 서→동달산 월명산 아미산 옥마산 만수산 축융봉 성주산 백월산 오봉산 천마봉 남산
●김홍주 소산(素山)산행문화연구소장은?
1932년 금산 출생. 42년간 교단에 서오다 1997년 퇴직한 뒤 산행문화의 발전을 위해 꾸준히 활동해 오고 있다. 산행을 주제로 한 저술활동으로 '한밭 그 언저리의 산들', '한국 51 명산록', '조망의 즐거움', '산행문화와 웰빙 라이프' 등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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