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중겸 전 충남지방경찰청장 |
첫 번째 사연- 초등학교 2학년 우리 반에 깡패가 있었다. 키는 작달막한데 손발이 어찌나 빠른지. 새까만 얼굴 내밀며 고아라는 말 입에 달고 살았고. 다들 겁먹고 슬슬 피했다.
도시락 뺏어먹기가 녀석의 일과. 드디어 내 걸 먹어치웠다. 도시락이야, 까짓 거, 뭐, 하루 안 먹으면 되지 하며 넘겼지. 헌데 다음날부터 괜히 시도 때도 없이 괴롭혔다.
연필로 볼을 찌르지 않나. 어깨를 쳐댔다. 발로 차기도 했다. 사실 나는 반에서 키가 제일 컸다. 덩치도 그 녀석의 배는 됐고. 나서는 성격이 아니었다. 조용히 지냈을 뿐이었다.
계속 그러니까 너무 화가 났다. 녀석을 번쩍 들어서 패대기쳤다. 책상 걸상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 그리고는 갑자기 조용해졌다. 고아 급우가 큰 부상 입고 만 거다.
방과 후 그 친구 부축하고 학교 나왔다. 너무 아파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미안하기만 했다. 나 보고 자꾸 너는 그냥 가라 했다. 발길 떨어지지 않았다. 고아원까지 갔다.
그곳 형들이 우르르 몰려 나왔다. 이 병신 어디서 맞고 오냐며 마구 패댔다. 죽도록 맞고만 있었다. 며칠 등교하지 않았다. 걱정 돼서 고아원에 찾아가 보았다.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학교 나왔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핼쑥하고 초췌한 모양. 놀라고 말았다. 백배사죄. 그리곤 붙어 다녔다. 내 용돈으로 빵이랑 포장마차 해삼 사서 나눠 먹고.
친해졌다. 친구 몸도 회복했고. 내 보디가드 됐다. 우정은 몇 년 지속됐다. 졸업 서너 달 앞두고 학교 안 나왔다. 여기저기 수소문했다. 끝내 찾지 못했다. 어디로 갔는지.
보디가드 친구가 사라지자 스스로 보호해야 함을 깨닫게 됐다. 실력 키워 나갔다. 덕분에 잘 살아 왔다. 그래서인가 그 친구 너무나 보고 싶다.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보고 싶다.
두 번째 내용- 중학교 때 다리 다쳤다. 너무 아파 읍내 병원에 갔다. 치료비 950원. 가진 돈은 동전 50원뿐. 그냥 가라고 손짓하는 거였다. 병원 문 나서며 눈물 주르르 흘렸다.
함박눈 쏟아지는 날 길가에서 대학 다니던 사촌형 만났다. 내 맨손 보더니 가죽장갑 벗어서 끼워주었다. 감기 조심하라며 멀어져 갔다. 나도 그렇게 살아야지 했다. 그게 어디 쉬운가.
대학생이었던 때 어땠는가. 그 집에 기거하면서 학생 가르치는 입주 가정교사 했었지. 열아홉 살 그때였다. 내내 후회하고 있는 일 저질렀다. 어젯밤 한밤에 깼을 때도 그날 떠올랐다.
초등학교 5학년과 2학년 동생이 찾아왔다. 주소를 어떻게 알고 왔는지. 당황했다. 빈티 흐르는 얼굴. 꾀죄죄한 옷차림. 불쌍한 그 모습. 안쓰러움은 어디 갔는가.
누가 볼까 두렵기만 했었다. 그 자리서 되돌려 보냈다. 대문 닫아 버렸다. 궁금해서 누구냐고 묻는 가정부. 잘못 찾아 온 애들이라 둘러댔다. 내 동기 형젠데 말이다.
어이없고 어리석기 한없는 짓. 무슨 돈 있었겠나. 한 시간 반 걸리는 거리. 왕복 세 시간 걸었던 길. 점심 무렵 쫓겨 간 두 동생의 배고팠던 길. 그 끼니 형 때문에 일생 걸렀다.
세 번째 전언- 40대 자매가 죽은 채 발견됐다. 언니는 병사. 동생은 굶어서 죽었다. 1원 단위까지 기입한 가계부. 외상은 붉은 색 볼펜으로 자세히 적어 놨다. 통장잔고 3원.
언니는 궁지에 몰려 관청에 세 번 찾아갔다. 최후의 보루 생활보호를 상담했었다. 대상이 아니라는 담당직원의 변함없는 대답. 그렇다면 어떻게든 살아보겠다는 말 남기고 돌아갔단다.
전기와 가스는 1월에 끊겨 있었다. 지적장애 동생을 병든 언니가 보살폈다. 휴대폰 발신기록은 111이 마지막이었다. 112나 119를 누른다는 게 잘못 누르고 만 거라 추정할 따름이다.
구조요청 했다고 마음 놓았을 터. 끝내 오지 않았다. 절망했는가. 자매의 표정은 밝았다 한다. 기다렸던 것이다. 오기를. 살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게 무슨 제도며 정책인가.
요즘이라 해서 가난이 죄라 눈물 흘리는 사람 없나. 우리가 사는 세상. 야, 이거, 정말, 살만하구나 하는 느낌. 실감나게 만드는 인물 어디 없나. 그런 이 대통령 만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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