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기 충남대 교수 |
구석기 유적으로는 용산동, 용호동, 대정동 유적이 있고, 신석기 적으로는 둔산, 관평동, 송촌동 유적 등이 있다.
청동기 유적으로는 비래동, 둔산동, 용산동, 가오동, 노은동, 궁동, 괴정동, 탄방동, 원내동, 문화동 유적 등이며, 철기문화유적은 오정동 및 구성동 유적에서 다수의 원삼국시대 움집터 들이 조사된 바 있다.
백제는 북쪽에서 내려온 유이민들이 한강 유역의 위례성에 자리 잡으면서 마한의 한 나라인 백제국에서 시작됐다. 4세기 후반 백제 근초고왕 때에는 마한의 전 지역을 확보해 전성기를 맞았다.
대전지역도 이 시기에 백제의 지배하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대전지역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동성왕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즉, 웅진 천도 후의 대전지역은 백제가 신라와 교류하려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요충지로, 당시에 백제의 수도 웅진성의 위성지역으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조선의 새로운 수도로 거론된 대전=고려시대, 대전은 공주에 소속돼 있었다. 즉, 회덕현과 진잠현, 유성현, 덕진현이 모두 공주의 속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태조 왕건은 훈요 10조 가운데 제8조에서 '차현 이남 공주강 밖은 지형이 조성을 배반할 형태며 인심도 또한 그러하니 관리로 쓰지말 것'을 강조했다. 차현 이남이란 지금의 공주, 논산 등 충남 남부지역과 전주를 중심으로 한 전북지역이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새 왕조는 수도를 결정하는 데 고심했다. 조선의 새 수도는 대전 근교의 계룡산 신도안과 지금의 서울이 후보에 올랐다. 조선시대의 대전은 충청도 공주목의 회덕현, 진잠현과 공주목에 흡수된 옛 덕진현, 유성현으로 이뤄져 있었다.
조선 초기 대전의 인구는 3000여명으로 추산되는데, 1760년대에 간행된 『여지도서』에는 2만3557명으로 증가한다.
#골이 깊었던 양반가와 농민의 갈등=9세기 중엽 이후 조선은 세도정치로 국가 재정의 위기를 불러왔다. 위기를 농민 수탈로 모면해 보려는 국가의 정책은 삼정의 문란을 야기했다.
19세기 후반 대전에서의 농민운동은 1862년 임술민란 시 회덕과 진잠에서의 봉기로 시작됐다.
회덕의 농민항쟁은 1862년 5월 10일 초군(초군)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났다. 충청도 최초의 농민항쟁이다.
회덕의 농민항쟁은 향촌사회의 지배 세력인 양반층을 공격한 특징을 보였다. 이러한 것은 회덕이 당시 집권 노론의 근거지로서 양반층이 수령이 간섭할 수 없을 정도의 권력을 행사한 결과로 볼 수 있다.
회덕에서의 농민항쟁은 이후 대전에서의 양반세력과 농민세력 간의 갈등과 대립의 원초가 되기도 했다. 대전은 양반가와 농민들 사이에 갈등이 컸다.
농민군은 반봉건과 반외세를 기치로 일어났지만, 양반들은 이들을 철저히 외면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양반들이 반일민족운동에 나섰지만, 농민군은 참여하지 않았다. 결국, 계급 대립을 극복하지 못한 채 일제 침략에 의해 경술국치를 당하고 만 것이다.
#개화의 물결을 놓치다=대전에서는 척사운동이 강했다. 송시열, 송준길 등 유학자를 배출한 주자학적인 학풍이 강했던 곳이라 서양 문물에 대해 척사적인 태도를 분명했다. 1876년 개화의 물결이 도시를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확산했지만, 대전에서는 개화의 움직임을 찾기 어려웠다. 이는 대전의 주자학적 학풍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천주교와 개신교의 전파는 비교적 늦게 이뤄진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국채보상운동은 대전에서도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진잠 출신의 박우서 등이 주도했다. 대전에서의 사립학교 설립운동은 회덕에서 일어났다. 1906년 전감찰 송헌범은 회덕의 대동리(동구 대동) 자신의 가옥을 개축해 '대아학교'를 설립했다.
윤희진 기자 heejiny@
▶다음주 강의:7일 대전의 무형문화유산 -외길, 그들에게 길을 묻다(류용환 대전시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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