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은남 경제부 부장 |
대한민국이 원자력 기술 식민지에서 원자력 기술독립국으로 위상이 달라졌다는 사실은 30년 전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30년 전 원자력과 관련 기술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원자력 기술자립이라는 사명감과 열정 하나만으로 '맨땅에 헤딩한다'는 각오로 연구했던 1세대 연구원들에게는 남다른 것이었다.
1970년대 고리 1호기를 미국 WH(웨스팅하우스)에 턴키로 발주했을 때 국민소득은 200달러였다. 고리 1호기 건설비는 당시 정부 1년 예산의 4배나 되는 엄청난 예산이 소요되는 것이었다. 당시로선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1978년 고리 1호기가 건설됐고 우리나라는 원전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1980년대 중반 원전 기술 자립을 목표로 한국형 표준 원전 개발에 매진했던 연구원들은 원자력관련 자료를 하나라도 얻기 위해 체면도, 자존심도 모두 버려야 했다.
“미국 기술진이 잘 가르쳐 주지 않으려던 기술을 빼내기 위해 몰래 설계도면을 보다 들켜 욕을 먹기도 하고 때로는 미국 연구진이 쓰는 연구실에 한국 연구진의 출입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또 “그 당시 부품공급이 원활하지 않아서 연구개발에 필요한 중요한 부품을 구하기 위해서 청계천 상가를 구석구석 찾아야만 했던 기억들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원자력기술 자립을 위해 기술식민지의 과학자들이 선진국에 기술을 구걸(?)하기 위해 자존심을 버린 일화는 책으로도 담아낼 수 없을 정도였다고 1세대 연구원들은 말한다.
30년 만에 원자력 기술 구걸국가에서 원전 수출국으로 설 수 있었던 것은 사명감 하나로 모든 것을 버려야 했던 원자력연구원들의 남모른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원자력 기술자립을 선언한 지 뒤 30년 만에 우리나라가 원자력 수출국으로 우뚝 선 것처럼 전남 고흥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고흥나로우주센터에서는 우주강국을 향한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을 비롯한 민간업체 관계자들이 자존심을 버리고 나로호 발사에 매진하고 있다.
두 번의 발사 실패 뒤 지난달 26일 마지막 3차 세 번째 도전에 나선 나로호는 고무링 하나 때문에 발사가 연기됐다.
고무링 하나 때문에 발사가 연기됐다는 소식에 '값비싼 불꽃놀이', '과학 쇼'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나로호 1단 로켓은 기술이전 없는 완제품을 구매한 것이고 단지 대한민국 영토에서 발사되었다는 사실에서만 의미를 찾기엔 너무나 비싼 불꽃놀이라는 것이다. 껍데기만 우리 기술이고 핵심부품은 러시아 기술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국내연구진들이 1단 로켓에 대한 설계도면은커녕 로켓 엔진과 관련해서는 접근도 되지 않는 등 한·러 우주기술보호협약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는 것은 사실이다. 30년 전 설계도면조차 보여주지 않아, 자존심마저 버리고 기술 구걸에 나섰던 원자력 연구원들이 겪었던 수모를 항공우주연구원들도 똑같이 경험하고 있다.
우리 손으로 로켓을 개발하겠다는 사명감으로 2차 발사 실패 뒤 2년여 동안 바다만 보이는 유배지(?)와 같은 나로 우주센터를 수없이 오갔던 연구원들은 고무링 하나 때문에 발사가 연기됐다는 것에 대한 실망은 누구보다 더한 것이었다.
잘하면 2주에 한번 빨랫감을 싸들고 대전 집을 오갔던 300여 연구원들, 조광래 나로호발사추진단장은 1·2차 발사 실패 이후 공황장애로 신경안정제를 복용하고 있다. 고무링 때문에 또다시 발사가 연기되는 수모 속에서도 3차 발사마저 실패로 끝난다 하더라도 이들은 우주발사체 개발에서 패잔병이 될 수 없다는 각오다.
2002년부터 추진해 온 나로호 사업이 이번 3차 발사로 끝이 나지만 우리 손으로 한국형 발사체 개발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지금은 러시아에서 15만 개 부품으로 조립된 발사체를 그저 구경만 하는 수준이지만 언젠가는 우리 손으로 발사체를 만들고 성공적으로 발사, 우주발사체 독립국에 인생을 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주발사체 식민지를 벗어나기 위한 이들의 노력은 원자력 자립을 위해 희생했던 연구원들처럼 시간이 지난 뒤에 평가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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