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웅순]아내의 갑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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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웅순]아내의 갑년

[중도춘추]신웅순 중부대 교수

  • 승인 2012-11-01 14:17
  • 신문게재 2012-11-02 20면
  • 신웅순 중부대 교수신웅순 중부대 교수
▲ 신웅순 중부대 교수
▲ 신웅순 중부대 교수
결혼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삼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아내가 갑년을 맞았다. 신혼 초에는 내 칫솔 옆의 아내의 칫솔이 낯설고 내 옷 옆의 아내의 옷이 낯설었다. 지금은 모든 것이 나란히 있지 않으면 그것이 낯설다. 아내가 없으면 가을 나무같이 허전하고 초겨울 잎새같이 쓸쓸하다. 잠시 비어 있어도 늘 아내가 기다려진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이렇게도 아름다운 것이다. 강은 산을 적시기 위해 그렇게도 철썩거렸는데. 어느 때부터였을까. 강물에 산이 빠질까 아예 강은 빈 배 한 척을 띄워놓고 있다. 그렇다. 아내는 강이요 나는 그런 산일지 모른다.

“세월이 참 빨라.”

“그렇지. 뜬구름이지.”

옛날 어르신들의 말씀이 가슴을 친다. 만추의 강은 푸르고 만추의 산은 붉다. 강에 비친 산이 강 때문에 더욱 붉다. 강물 위에 둥둥 떠내려가는 낙엽들은 내 지난날 욕심과 상처의 부유물이다. 그것들은 쪽배가 되어 가을 햇살 한 줌 싣고 먼바다 어디론가 여정을 떠날 것이다. 그리고 지구 끝 어디선가에서 무거운 짐을 부릴 것이다. 못 부친 엽서 한 장 한 장들은 그보다 더 멀리 가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 지친 고독을 내려놓을 것이다.

눈물 나게/ 아름답습니다. //

당신이/ 그런 사람입니다.

-필자의 시 '당신' 전문

내가 예까지 걸어온 것은 아내의 덕이다. 버거운 인생의 짐을 지고 먼 여행길에 오른 눈먼 민달팽이. 그 앞에서 촉수가 되어 준 아내의 따스한 손길. 불혹에서 흐느끼던 바람도 지천명에서 울던 파도도 아내의 불빛 앞에서 결국 잦아들고 말았다. 어느덧 아내도 나를 기다리는 내 어머니가 되어가고 있었다.

부모님은 오래전에 우리 곁을 떠났다. 얼마 후면 아이들도 새둥지로 날아갈 것이다. 이제 집에는 아내와 나만이 먼 불빛으로 남아 산기슭 오두막집에서 아이들을 위해 기도할 것이다. 나이를 먹으면 하늘로 떠나고 날개가 자라면 새둥지를 찾아 떠나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때맞추어 갑년이라는 낯선 나그네가 불쑥 찾아와 황혼의 문을 흔들어댄다. '으흠' 허락도 없이 체면 불구 뒷짐을 지고 들어온다. 참으로 염치없고 버릇없는 황혼의 과객이다. 싫지만 이를 쫓아낼 수 있는 사람은 세상 어느 누구도 없다.

선친께서는 갑년 그 이듬해에 돌아가셨다. 이제 내가 그때 그 나이가 되었다. 돌아가신지 삼십 년도 넘었으니 아마 백골이 진토되었을 것이다.

아내의 갑년이 낯설다. 아이들이 엄마의 갑년을 기념해준단다. 저녁 한 끼긴 하나 나와 아내에게는 최고의 만찬이 될 것이다. 그 선물은 부모님에 대한 아이들의 지극한 효심에서 나온 것이리라.

가을비가 내렸다. 가을 바람이 시를 쓰고, 가을비가, 바람이 남기고 간 혈흔을 지우고 간다. 지워진 세월 뒤로 우르르 낙엽들이 몰려온다. 얼마나 많은 외로움이 몰려왔다 몰려갔는가. 그것들을 쓸고 간 눈발들은 지금까지도 자신의 흔적들을 남기지 못하고 영원히 사라졌다.

내가 아내를 만난 것은 천운이었다. 이런 운은 현세에도 내세에도 다시는 없을 것이다. 운이 하도 박해 하늘은 '아내'라는 사람,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명품을 내게 주셨다. '사랑하라'는 명품 글귀를 지금에 와 읽고 있으니 나는 참으로 미련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다. 산을 넘은 가을이 더욱 가파르다. 시간은 자꾸만 짧아져 간다. 짧아지는 시간을 어떻게 이어야 값진 무늬를 새길 수 있을까.

갑년을 맞은 아내의 예쁜 얼굴을 바라본다. 가을 햇살같이 잔주름 몇 개 비칠 뿐 아직도 미인이다. 나는 아내를 동서고금의 가장 소중하고 애틋한 여인으로 남겨두고 싶다. 내 어떻게 할 것인가도 나만이 아는 비밀로 남겨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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