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호택 연세소아과병원장, 전 국제로타리 3680지구 총재 |
첫 번째 단계는 스스로의 인생에 대해 빚을 지는 시기다. 부모에 의해 태어나고 자라면서 선생님, 선배, 동료의 도움을 받아 한 사람의 성인으로 성장하기까지의 기간이다. 25세가 지나면 그동안 진 빚을 갚는 시기가 된다. 사회에 나와 일을 하면서 결혼해서 자녀를 낳아 기르고, 그 자녀가 인생의 빚을 갚을 수 있도록 성장할 때까지 보살피는 것이 빚을 갚는 행위다. 그리고 50세가 되면 스스로 진 빚을 모두 갚고 몸을 던져 종교에 귀의한다는 힌두교적 인생은 우리 사회에서 '사오정', '오륙도'라는 말과 같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은퇴를 생각해야 하는 시기로 해석된다.
인생에 빚을 지는 행위는 누구나 하면서 자라지만 요즘 세태로 볼 때 젊은이들이 그 빚을 갚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취직이 힘들고 결혼도 힘드니 어떻게 빚을 갚는단 말인가. 취직은 나 혼자 하는 일이니 노력하면 된다 치자. 결혼은 상대가 있어야 하고 집안도 결부되다 보니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부모 마음은 본인보다 더 답답하다. 과년한 딸을 가진 부모라면 누구나 좋은 배필 만나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을 바라겠지만 항상 일에 치여 사는 딸을 가진 부모는 머리가 한층 더 복잡하다. 결혼과 일을 바꾸든지, 아니면 가정과 일을 병립할 수 있는 여건을 가진 배우자를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소아과 레지던트로 일하는 큰 딸이 혼기에 접어들면서 마음이 조금씩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올 봄에 전문의 자격을 따고 나니 더 급해졌지만 부모 마음만 답답한 것 같았다. 대학에서 연구강사 노릇 하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정작 본인은 무사태평이었다. 그러던 중에 '임자'를 만나자 불과 6~7개월 만에 결혼에까지 이르는 딸을 보면서 합리적인 사고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경험을 했다. '우연'이 아닌 '인연'이란 것이 과연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이 밥 먹여주던' 시절은 오래 전에 지나갔고, 낭만보다는 조건이 우선시되는 세태를 탓할 마음은 없으니 사랑하는 마음과 제반 조건이 함께 만족되는 배우자를 만나기를 학수고대할 수밖에 없다.
이런 희망이 맞아떨어지면서 좋은 집안에서 성장한 좋은 사위 만나 결혼에 이르게 된 것이 우리 부부에게는 대단한 우연 아니면 인연이다.
내 딸은 시집살이 중이다. 불과 며칠 되지 않았다. 일과 남편 수발을 다 잘할 자신이 없다면서 본인이 선택한 삶의 방식이고, 시댁에서 흔쾌히 받아주었다. 아들만 둘 키우다가 '딸 같은 며느리를 보게 되어 너무 좋다'면서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우리 부부에게는 고맙고 미안한 일이다.
'웰컴 투 시월드'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말이 시집살이지 요즘은 시부모가 며느리 눈치 볼 일도 많다는 세상 아닌가. 자연히 우리 부부는 사돈 내외의 노고에 미안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건강한 방식으로 결혼생활을 시작한 딸에게도 고맙다. 가까워지려면 같이 사는 것보다 더 빠른 방법은 없기에 시댁의 가풍도 익히고 시부모를 친부모와 같이 느낄 수 있는 길을 자청해 주었기 때문이다.
힘들고 어려운 과정 중에 있더라도 참고 기다리다 보면 좋은 인연은 반드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첫 딸 시집보내면서 배웠다. 나에게는 아직 미혼인 딸과 아들이 더 있다. 좋은 인연이 계속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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