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신호 대전시교육감 |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중의 하나는 선생님들의 제자에 대한 내리사랑일 것이다. 디지털 문명의 진화 속도에 비례하여 세태는 사나운 속도로 변화하고 있지만, 여전히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간직하고 예나 지금이나 교육 현장에서 우리 선생님들의 제자 사랑은 식을 줄 모르고 있다. 밤늦은 시간까지 퇴근을 미룬 채, 교육에 전념하고 있는 모습은 성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교육계 밖에서는 우리 교육에 대해 끊임없이 불편한 시선을 던지고 있다. 그 이유를 선생님들의 교육에 대한 열정 부재보다는 소통의 왜곡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소통(疏通)'은 막힘이 없는, '트임'의 쌍방향성을 갖는 것인데, 소통이 일방적이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소통을 뜻하는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은 '공적인', '일반적인'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라틴어 '코뮤니스(communis)'에서 유래했는데, 어원에서 보듯이 커뮤니케이션은 개별적 주체가 사적인 위치에서 공적인, 일반적인 자리로 편입되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여기에서 사적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커뮤니케이션의 폭력성이 드러난다. 『장자』의 숙과 홀이 혼돈의 사적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신들이 갖고 있는 일반적 입장에 서서 일방적 소통을 시도한 결과로 그들의 선물은 혼돈에게 독이 되고 말았다.
교육도 마찬가지이다. 교사가 학생의 사적 입장(개인적 소질, 흥미, 능력)을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교사의 가치만을 주입하려 든다면, 아무리 큰 사랑으로 가르치려고 해도 올바른 교육이 될 수 없다. 교사가 먼저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학생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그들의 사적 입장을 충분히 이해했을 때, 진정한 소통과 교육이 이루어질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구나 다 대학에 가야만 하고, 밤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책을 보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요리를 하고 싶은 학생은 도마, 칼, 식재료와 접속을 해야 하고, 음악을 하고 싶은 학생은 악기, 악보와 접속을 하면 되고, 인지 능력이 좋은 학생은 책과 접속하면 된다. 모든 학생에게 책과 접속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너무나 폭력적이다. 학생의 사적 입장에 귀를 기울여 소통하고, 그들이 원하는 것과 접속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참교육이다.
진정한 소통을 위해 『장자』를 한 구절 더 읽어보자. '인간세(人間世)' 장에 "말[馬]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자는 광주리로 똥을 받고, 귀한 술잔으로 오줌을 받습니다. 그러나 때마침 모기와 등에가 말 등에 붙어 있어, 불시에 말의 등을 치면 말이 놀라 재갈을 풀고, 주인의 머리와 가슴을 걷어찰 것입니다. 뜻을 이루려다 진정한 사랑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학생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크지만 소통이 왜곡된다면, 우리의 교육은 오히려 불신과 반발을 사게 될 뿐이다.
교육 결실의 계절 가을이 왔다. 교육(educate)은 'ex-'(안에 있는 것을)밖으로 'ducere' 끌어내는 것이다. 참다운 교육은 교사의 일방적 가치 주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학생의 잠재된 역량을 발견하고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토대는 쌍방향적 소통에 있다. 올 가을은 우리 선생님들이 사랑하는 학생들과 진정한 소통을 함으로써, 선의에 충만한 숙과 홀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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