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신한 한남대 철학과 교수 |
이스탄불의 수많은 유적지 가운데 '아야소피아'라 불리는 사원이 있다. 이 건축물은 이스탄불이 콘스탄티노플이었을 때 지어진 성당으로서 이스탄불의 유적지 가운데 역사의 우여곡절을 가장 많이 간직한 곳이다. 기독교의 새로운 중심지가 된 콘스탄티노플과 동로마제국의 당당한 힘을 바탕으로 건립되었던 성당이 이슬람사원으로 변화한 모습은 너무나도 인상적이다. 콘스탄티노플이 이스탄불로 바뀐 것 가운데는 지배자의 교체만이 아니라 지배 민족이 숭배하는 종교의 변화도 들어 있었다. 역사의 연속성에는 정치의 변화만이 아니라 종교의 변화도 포함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슬람을 믿는 오스만터키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이후 아야소피아 성당을 파괴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아야소피아 성당 내부의 아름다운 종교적 상징들을 회칠하여 보이지 않게 했다 하지만 이 성당을 아예 모스크로 바꾸어 사용했다는 것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놀라운 사실이다. 다른 종교의 건축물을 파괴하지 않고 자신의 종교를 위해 사용했다는 역사는 종교 자체가 갖는 문화적 힘을 보여준다. 아야소피아 성당에서 우리는 초월적 신앙과 현실적 삶이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역사 속의 종교는 삶의 종교이며 문화로서의 종교다. 개인의 삶과 한 시대의 삶은 역사적 삶으로 이어진다. 개인의 신앙과 민족의 신앙도 역사의 변화와 함께 그곳의 문화로 남는다. 삶의 문화로 이어지지 않는 종교는 현실의 변화와 무관할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종교의 가르침과 신앙인의 삶은 아예 분리되어 있을 것이다. 종교적 교리는 원래 추상적인 것으로서 언제나 개인의 변화하는 삶을 넘어서 있다. 그러나 신앙인의 삶은 종교적 가르침을 현실 가운데 실현해야 하며 이를 통해 자신의 삶과 주변의 현실을 변화시켜야 한다. 문화로서의 종교는 이와 같은 현실의 변화에서 비로소 확인된다. 그러므로 현실의 문화로 자리 잡지 못하는 종교는 신도의 숫자나 교세와 상관없이 역사에 기여하는 바가 많지 않다.
개인이 종교적 초월을 체험함으로써 자신과 현실을 변화시키고 이로부터 새로운 삶의 문화를 형성한다는 것은 종교가 갖는 진정한 힘이다. 문화로서의 종교는 그때마다 삶의 지평을 늘 새롭게 넓혀준다. 삶에서는 낯선 것과의 접촉을 피할 수 없다. 낯선 것을 배제하고 이와 대립하는 것보다 이를 인정하고 대화하며 경우에 따라 이를 수용하는 것은 평화로운 삶을 보장한다. 낯선 것이 이념이나 종교인 경우 이러한 인정과 대화는 결코 쉽지 않으며 극한 대립을 낳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낯선 것을 정신적 문화로 받아들일 때 종교와 이념은 서로 인정할 수 있다. 이러한 인정과 관용은 평화로운 공존으로 이어지며 더 나아가 양자의 이질적인 문화를 뛰어넘어 새로운 삶을 구현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유구한 역사 속에도 수많은 종교의 전승과 전통이 있다. 이들은 각자의 고유한 가르침 속에서 대립하기도 했지만, 종교가 삶의 문화가 됨으로써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었다. 종교의 평화로운 공존은 낯선 종교 속에서 삶을 위한 공통의 가치를 발견할 때 가능하며, 이는 새로운 정신의 창출로 나타나기도 한다. 새로운 정신의 등장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주어져 있는 정신의 인정에서 시작한다. 537년에 건립된 아야소피아 성당은 이러한 종교적 대립과 인정의 역사를 웅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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