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달우 공주대 사범대학 교육학과 교수 |
처음에는 앞으로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 옛 모습이라도 기억에 담아두고 싶다는 소박한 생각으로 길을 나섰던 것이다. 그런데 중앙청사 지역을 지나 진의리, 양화리 지역에 들어서자마자 불현 듯 야은(冶隱) 선생의 회고가가 떠오르면서 알 수 없는 비감에 휩싸이고 말았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다/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진의리, 양화리, 나성리 등 전월산 자락은 입향조(入鄕祖)인 고려말의 충신 임난수(1342~1407) 장군이 이곳에 터를 잡은 이래, 부안임씨 전서공파가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온 곳이다. 무려 1000여 가구에 달하는 국내 최대의 집성촌이 600년이 훨씬 넘는 기나긴 세월 동안 삶의 터전으로 삼아온 곳이다.
그러나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사업이 진행되면서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터전을 제공했던 전월산 자락의 부안임씨 집성촌은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집집마다 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삽살개가 쫓아 나오는 그런 평화로운 시골마을의 정취는 간데없고, 남은 것은 찬란한 가을햇살 아래 널브러진 적막감뿐이었다. 사람들은 고향을 떠났고, 마당가의 감나무 몇 그루가 쓸쓸히 주인 없는 빈집을 지키고 있었다. 이제 머지 않아 이곳 사람들의 생명의 근원이었던 그 너른 장남평야도 물바다가 될 것이고, 전월산 골골마다 자리잡은 부안임씨 집성촌 마을에도 중장비의 굉음이 들이닥칠 것이다.
산 사람만 삶의 터전과 고향을 잃은 것이 아니다. 무려 2만여 기(基)에 달하는 선대의 분묘까지도 유택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결국 이승과 저승에서 수많은 생령(生靈)이 고향을 잃은 실향민이 되고 만 것이다. 모르긴 해도 부안임씨 득성(得姓)이래 이보다 더 큰 환란은 없었을 것이다. 가히 가문의 존폐가 걱정될 만한 상황이다.
세종시 건설이 국가적인 대역사인 만큼 개발에 반대하는 입장만 앞장세우기는 어려운 형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안임씨 대종중이나 소종중에서도 건설청에서 제시하는 개발의 논리를 어쩔 수 없이 수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절실한 공공개발이라고 해도 지켜야 할 정도(正道)가 있는 것이다. 개발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개발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노력을 보여야 한다. 공생(共生)과 배려의 정신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1000여 가구나 되는 한 성씨가 한 지역에서 700년에 달하는 세월 동안 살아온 경우는 국내는 물론이고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물 것이다. 그 자체로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더구나 이곳은 세종대왕이 임난수 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사패지(賜牌地)로 내렸던 곳이다. 세종시가 된 오늘날에 와서 이곳이 보존을 걱정해야 될 처지가 되었으니 딱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부안임씨 종중에서도 민속마을 지정 및 그 영역의 확장을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한 성씨의 700년 터전을 거의 유린했다고 봐도 될 정도의 양보를 얻어냈다면, 거기에 상응하는 만큼의 대책은 세워줘야 할 것이다. 전 지역을 보존하는 것이 어렵다면, 일정 지역을 보존지역으로 지정해 최대한 원상을 보존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도 있다.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도시의 건설이라는 세종시의 도시건설 이념 그 자체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서도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우연히 지나던 행인도 이런 생각을 갖게 되는데, 하물며 그 곳에서 살았고 또 죽어서 뼈를 묻을 사람들의 속내는 어떻겠는가? 잠시 둘러보던 그날부터 오늘까지 줄곧 한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생자(生者)든 망자(亡者)든 어느 한 쪽을 위해서 다른 쪽으로 하여금 한(恨)을 품게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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