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찬 대전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검은 눈동자에 맺히는 상이 둥근 부처의 형상을 띠고 있어 '부처'라는 말까지 붙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이 '눈부처'는 일상의 언어생활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 어휘였다. 그런데도 그것이 제법이나 일반인들에게까지 알려졌고, 시나 소설에서도 간간히 쓰임이 목격되는 데에는 정호승 시인의 시 '눈부처'의 공이 크지 않았는가 여겨진다. '눈부처'는 1987년에 발표된 시집 '새벽편지'에 실려 있는 작품이다.
“내 그대 그리운 눈부처 되리 / 그대 눈동자 푸른 하늘가 / 잎새들 지고 산새들 잠든 / 그대 눈동자 들길 밖으로 / 내 그대 일평생 눈부처 되리 / 그대는 이 세상 / 그 누구의 곁에도 있지 못하고 / 오늘도 마음의 길을 걸으며 슬퍼하노니 / 그대 눈동자 어두운 골목 / 바람이 불고 저녁별 뜰 때 / 내 그대 일평생 눈부처 되리.”
시인은 언젠가 아기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고 했다. 갓 태어난 아기가 차차 자라서 눈을 뜨고 시인을 쳐다보기 시작했을 때, 아기의 아버지가 된 시인은 아기의 맑고 푸른 눈동자에 매료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경험은 자식을 낳고 키워본 사람이라면 한두 번 정도는 있었을 법한 일이리라. 더 나아가, 시인처럼 아기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놀라고, 놀라면서 행복해 하고, 행복해 하면서 자신을 부끄러워 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러한 감동을 글로 표현하고 싶어 했다. 아기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난 뒤의 어느 날, 무심코 국어사전을 뒤적거리던 시인은 '눈부처'라는 말과 함께 그 풀이를 발견하고는 놀라 무릎을 탁 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2001년에 나온 그의 산문집 '인생은 나에게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에 수록된 경험담이다. 이 책에는 '눈부처'를 발견했을 당시 시인이 느낀 감회의 일단이 이렇게 소개되어 있다.
“눈부처!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우리 선인들은 어찌 이런 말까지 생각해내었을까. 일찍이 어떤 선인이 있어 아기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그려내려고 고심하다가 문득 이런 말을 쓴 것이 아닐까. 한 사람의 눈동자 속에 비친 또 한 사람의 모습을 '눈 속에 앉아 있는 부처'로 표현한 선인의 마음이 내 마음속 깊이 퍽이나 아름답게 전달되었다.”
그런데 시인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랑하는 이의 눈에 비친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눈부처로 모아내 한 편의 시를 만들어냈고, 시 '눈부처'는 그렇게 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눈부처가 되려면 함께 있어야만 한다. 내가 그대의 눈부처가 되겠다는 말은 '나는 그대를 사랑합니다'라는 뜻을 품고 있다. 그 말은 또한 '나는 그대의 사랑을 받고 싶습니다'라는 뜻을 품고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영원한 사랑이 될 것이라는 뜻까지 품고 있다.
시인의 섬세한 눈길이 죽은 어휘가 되어버린 우리말 하나를 찾아냈고, 거기에 새로운 생명과 향기를 불어넣어 보석처럼 반짝이는 어휘로 다시 태어나도록 한 것이다. 이 어찌 놀라운 일이 아니겠는가. 동화작가 정채봉은 이 같은 사연을 시인으로부터 직접 듣고는 자신의 똑같은 기억을 떠올리며 '정작 아름다운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눈동자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라고까지 했다. 그의 산문집 '눈을 감고 보는 길'에서 목격한 발언이다.
고전소설 '장끼전'에도 이 비슷한 용례가 들어 있는데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덫에 치여 숨이 넘어가는 장끼가 그의 아내 까투리에게 이렇게 말을 한다. “눈청을 살펴보소. 동자부처 온전한가.” 그 말을 들은 까투리의 대답이다. “이제는 속절없네. 저편 눈의 동자부처 첫새벽에 떠나가고 이편 눈의 동자부처 지금 떠나가려고 파랑보의 봇짐 싸고 곰방대 붙여 물고 길목버선 감발하네.” 생사의 길목에 서 있는 두 남녀의 처절한 정황이다.
'눈부처', '동자부처', 참 재미있는 말이고 보석과도 같이 아름다운 우리말이다. 이런 말들을 다 붙잡아서 고스란히 전해준 한글이 새삼 고맙고, 새삼 소중하고, 새삼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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