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용길 충남대 경영학부 교수 |
박근혜 후보의 역사인식 내지 역사관이 많이 비판받고 있다. 미래지향적 시대를 열어가고 국민통합을 이루기에는 역사관이 너무 퇴행적이고 편협한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 사례가 5ㆍ16 군사 쿠데타와 10월 유신, 인혁당 사건에 대한 박 후보의 발언이다. 5ㆍ16은 공산침략으로부터 국가를 지키기 위한 '구국의 혁명'이었으며, 5ㆍ16이 없었으면 공산주의 밥이 되었을 것이라 하였다. 현대사의 치욕적 암흑기로 평가되는 10월 유신은 '자주국방'을 위해 강력한 지도체제가 필요했기 때문이라 강변하였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유신시대 대학을 다녔던 필자는 유신의 폭력성과 야만성을 너무도 생생하게 체험하였기 때문에 그런 발언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릴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박 후보의 역사인식은 대선이 다가오면서 약간 수정되기 시작했다.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었고,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고 하였다. 민생을 제쳐놓고 과거사 문제를 갖고 싸우지 말고 미래로 가자고 하였다. 그러다 유신시대의 대표적 사법살인으로 평가되는 '인혁당 사건'에 대해 무지하고 진정성 없는 발언이 알려지면서 국민 여론은 요동쳤고 박 후보의 지지도는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그 즈음에 문재인 의원이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결정되면서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고, 안철수 교수도 곧이어 대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박 후보의 지지도는 더욱 떨어지기 시작했다. 다급해진 박 후보는 지난 달 24일 5ㆍ16과 유신, 인혁당 사건 등은 헌법가치가 훼손되고 대한민국의 정치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이로 인해 상처와 피해를 입은 분들과 가족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했다.
박 후보의 사과발언을 들으면서 불행하게 부모를 잃은 한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이 들면서 동시에 사과의 진정성에 의문이 들었다. 박 후보의 지지도가 떨어지지 않았어도 저런 발언을 하였을까? 결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떠밀려서 한 사죄 발언이었기 때문에 사과의 진정성도 그 효과도 반감되었다. 또한 역사인식 내지 역사관이라는 것이 며칠 만에 바뀔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역사관이란 오랜 시간에 걸쳐 삶의 다양한 경험과 비판적 성찰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며칠 만에 급조된 국민 눈높이에 맞춘 역사관이라는 것을 마치 시험의 모범답안처럼 일방적으로 낭독하고 사라지는 모습에서 사과의 진정성을 찾기는 어려웠다. 오전에 사과하고 오후에 젊은이들과 흥겹게 말춤을 추는 모습에서 기만당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일까?
과거는 단순히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현재와 소통하면서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죽은 과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학자인 카(E. H. Carr)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 없는 대화'라 하였다. 역사관이 퇴행적인 지도자는 결코 밝은 미래를 열어갈 수 없으며, 편협한 역사인식을 가진 지도자는 국민을 하나로 묶을 수 없다. 과거사 논쟁은 과거를 놓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놓고 치열하게 논쟁하는 것이고, 누가 더 미래의 적합한 지도자인지를 따지는 매우 엄중한 과제다. 역사의 판단에 맡기고 미래를 이야기하자는 것은 반역사적이고 무책임한 태도다. 만일 일본이 과거의 식민지 지배와 위안부 문제를 역사의 판단에 맡기고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로 나아가자고 할 때 동의할 수 있겠는가?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고 하였다. 조지 오웰(G. Orwell)의 말이다. 너무도 정확하게 오늘의 한국 현실을 지적하고 있다. 철저한 과거사 논쟁을 통해 누가 우리의 미래 지도자로 적합한지 검증되어야 한다. 한국의 현대사는 분단상황과 개발논리에 의해 너무도 왜곡되어 있다. 해방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보수 세력이 지배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깨고 과거사에 대한 균형된 평가와 인식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바르게 열어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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