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웅순 중부대 유아특수교육과 교수 |
솔바람소리와 물소리가 들려올 때는 원추리꽃과 도라지꽃이 흔들렸다. '얼렁 처얼렁' 워낭소리에 산그늘은 고무줄처럼 짧아졌다 길어졌다 했다.
선친께서 제일 아끼시던 재산목록 1호인 소. '얼렁 처얼렁' 워낭소리를 내며 소는 그늘을 따라 부지런히 풀을 뜯고 있었다. 하루에 열개씩 외우던 단어장은 늘 땀에 젖어있었다. 소에 풀을 배불리 먹이는 것이 내가 해야할 하루 일과였다. 여름 저녁 소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온통 참깨밭이었다. 늦여름인데도 참깨꽃은 그늘과 물소리에 묻혀 서늘했고 스산했다. 어떤 때는 굵은 빗방울이 참깨밭을 후두두둑 때리고 지나갔다.
훌쩍거리기도 하고
짤끔거리기도 하고
눈썹을 적실 때도 있었습니다
지난 날
내 울다만
솔바람과
산그늘
그리고 저녁 빗방울들입니다
-'참깨꽃' 전문
보이는 것이 하늘이요 산과 들이었고 들리는 것이 새소리요, 바람소리, 풀벌레 울음소리였다. 산과 들은 내 삶의 전부였다. 어린 시절 모든 것이 거기에서 일어났고 모든 것이 거기를 떠났다. 그것은 내 가슴에서 적막으로 남아 이제는 하다만 것들, 울다만 것들이 되어버렸다. 봉숭아, 백일홍, 맨드라미, 분꽃들을 보면 가슴이 뭉클하고 아리다. 그 꽃들은 나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고 나와 함께 이별했던 내가 가장 많이 정을 주었던 친구들이었다.
'고향을 떠나던 날/그녀의 젖은 눈을/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그 꽃도 백일홍이었다. 어디 그 꽃만이랴.
'솔바람 소리 보고 가지말라 했고/ 물소리 보고도 가지말라고 했습니다//그런데/가고 말았습니다.'
첫사랑도 솔바람소리, 물소리였다.
'육이오 때/다섯 살 난 아이가 지나간 길입니다//그 길가에 애기똥풀이 피었습니다.'
고향 빈집의 애기똥풀도 그러한 꽃이었다.
왜 나는 이런 고향의 정들을 내려놓지 못하고 반세기 동안 무겁게 예까지 끌고 왔는가. 이제 시가 되면 다 고향으로 돌려보내 줄 것이다.
아득히 천리길에서 혼자 몸살을 앓았던, 한 동안 워낭소리, 물소리를 들으며 피어났던 참깨꽃. 내가 반세기를 바라봐주고 기억해주었던 참깨꽃이었다.
이제 밭주인은 가고 없다. 워낭소리도, 물소리도 없어졌다. 주인없는 지번만이 남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지금쯤 햇살과 달빛이 나 대신 초가을 산기슭을 둘러보고 갈 것이다. 참깨밭을 지나갔던 그 때의 워낭소리와 빗방울들. 세월 어디쯤에서 새벽 바람이나 저녁 안개쯤 되어 있을 것이다. 지금쯤 환한 메밀꽃밭을 막 지나가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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