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호범 박사 |
아시아계 최초의 워싱턴주 상원 부의장 미국명 닥터 폴 신, 신호범(78ㆍ사진) 박사.
신호범 박사가 한국 체류 마지막 일정으로 16일 오후 3시 30분 대전남부장로교회(담임 류명렬 목사) 초청 간증 특강 마지막에 건넨 인사말이다.
만면에 인자한 웃음이 가득한 신 박사는 인정 많고 자상한 성품에 유머감각까지 겸비해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인기가 많다.
워싱턴주에서 한국인뿐만 아니라 20%에 달하는 유색 인종의 이익을 대변해 온 자긍심 높은 한국인인 신 박사는 네살때 고아가 된후 서울역에서 구걸하며 살다가 6ㆍ25 전쟁후 미군부대에서 하우스보이로 일하던 중 군의관 레이 폴 대위의 양자로 미국땅을 밟게 됐다.
“말도 안통하고 교육도 못받고 외톨이로 지내면서 서러워 눈물짓는 저에게 다가와 따뜻하게 포옹해주고 위로해 준 양아버지의 은혜를 평생 잊지 못할겁니다.”
양아버지의 사랑의 포옹이 폴의 인생을 바꿔놓았고, 이때부터 양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미국에 온후 세시간 이상 자본적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공부해 1년 4개월만에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이후 박사학위 받고, 교수되고 부동산을 통해 재산도 얻은 신 박사는 1986년 양부모를 위해 양로원을 기증했다.
이때 양아버지는 신 박사의 손을 잡고 울었다. 그러나 감격의 순간을 뒤로 하고 양아버지는 세상을 떠나 신호범의 눈시울을 젖게 만든다. 1주일이 멀다하고 양아버지 산소를 찾는 신 박사의 효성은 남다른데가 있다.
“32년간 교수로 지냈던 저에게 주위에서 정치에 입문할 것을 권했는데 젊은 시절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백인들의 식당에서 쫓겨나고 몇날 며칠을 서러워 울었던 기억에 정치인이 되면 유색인종 차별법을 고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정치에 과감히 뛰어들었죠.”
교회 장로이기도 한 신 박사는 힘들때마다 성경을 읽으며 힘과 용기를 얻었다”고 했다.
이날 미국으로 떠나기전 신 박사는 “아버지의 나라 미국과 어머니의 나라 한국의 가교 역할을 하면서 이민 2세 인재들을 양성하는데 여생을 바칠 생각”이라고 말했다.
한성일 기자 hansung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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