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다가 보니 개떡 수제비' 안 되도록
'꿈에 떡 맛보기',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기'는 그만….
시작이 반인가. 문톡(문화토크) 스타일의 '시루떡 정보 원리' 첫머리가 시원찮아 잠깐 머리를 식히는데, L교수의 카톡(카카오톡) 상태메시지가 눈에 들어온다. '삶은 꽃이다. 사랑은 그 꽃의 꿀이다'라는 빅토르 위고의 연애편지 구절이 떠 있다. 내 카톡의 대응 메시지는 외국 속담이다. “사랑은 달콤하다. 그러나 빵과 함께 최상의 맛을 낸다.”
이 속담을 우리가 만들면 '빵'의 자리에 '밥'이거나 밥의 일상성을 탈피한 '떡'을 주물러 넣었을 것이다. 일본의 '꽃보다 경단'이 우리 '꽃보다 떡'이다. 먹을 것 중시에는 문화 간 큰 차이가 없지만 변별성은 있다. 떡이 전형적으로 그렇다. 빵과 케이크에 안방을 내주고도 떡은 아직 돌잔치, 개업, 기념행사 등에서 특수한 지위를 누린다. 첫 이삿짐을 풀고 오늘(17일) 세종시 시대의 공식 첫날을 맞은 국무총리실에도 이사떡 신고에 앞서 맞이하는 편의 환영 시루떡이 돌려진다.
호주나 남아공, 브라질의 행정도시에서라면 맛보지 못할 우리만의 '역사적'인 떡이다. 이사 때 일본에서도 '힛코시소바'를 돌린다. '이사 메밀(국수)'쯤 되겠는데, 메밀(소바)의 발음이 이웃(傍, 側)과 같아 그들 식의 정 나누기에 이만한 음식이 없다. 뉴요커들은 가끔 '웰컴 비스킷'으로 축하하기도 한다. 그러나 떡 돌리기만큼 끈끈하지 않다.
언어생활에서도 우리는 뜻하지 않게 좋은 일에 '웬 떡이냐' 한다. '빵과 소금 없이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폴란드인도 '떡 되다', '떡실신'의 속뜻은 모른다. '반쪽의 빵도 없는 것보다 낫다'는 영국인이 '떡 주무르듯 하다'를 알 턱이 없다. 외국인이 '같은 떡도 맏며느리가 주는 놈이 크다'를 이해하려면 문화의 속살을 공부해야 한다. 흰 옥수수만 먹는 아프리카 부족, 구호품으로 도착한 노란 옥수수자루 곁에서 죽어가는 그들 속을 우리가 모르는 사정과 같다.
알게 모르게 떡 인심은 스마트 시대에도 정(情)의 메신저 기능을 잃지 않았다. 복이 따라오게 옛집 문구멍을 찢고 복이 쓸릴까봐 비질도 안 하고 떠난 습속, 집안 망한다고 신 음식과 식초병을 두고 떠나는 금기, 이삿짐 장롱에 붉은 팥떡을 넣고 새 집 사방에 팥죽을 뿌리던 귀신 쫓기, 시루떡으로 복 빌고 동네방네 나눠먹던 그 원형질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의미야 조금 변질됐지만 시루떡 한 접시의 추억과 꿈은 망각되지 않았다. 이사 동기가 무엇이건 달콤바삭하게 잘살고 싶은 염원을 안고 간다. 정부세종청사로의 이사 행위는, 서울에는 떡시루째 가고 지방은 팥고물만 떨어지던 시대와 작별하는 중요한 의도가 있다. 번화한 광화문의 정부서울청사에 비해 당장은 심란한 벌판으로 보일 수는 있겠다.
그렇다면 솥단지만 걸면 이사 끝났다고 간주한 조상들의 살림살이 경책이라도 배워봐야 할 것이다. 따뜻한 표준 정서가 담긴 축하 시루떡에 담긴 마음을 받아 불편과 걱정을 설렘과 두근거림로 바꾸면 좋겠다. 비어 있음은 채움의, 없음은 있음의 창조적 모태다. 총리실 선발대가 중도(中都), 신도(新都)의 해피엔딩을 주도하길 바라는 마음, 굴뚝같다.
최충식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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