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욱 교수 |
남자가 여자에게 말한다. “사랑해.”
여자도 남자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이다. 남녀 모두에게 좋은 감정을 느끼게 하는 '사랑해', 하지만, 남녀의 의미는 다르다. 서정욱 배재대 심리철학과 교수는 말한다.
“남자의 '사랑해'는 '지금부터 네게 못된 짓을 할거야'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사랑하기 때문에 못된 짓을 하는 것이다.”
사랑은 이렇게 아주 간단하게 시작한단다.
#사랑을 받으려면 뇌를 속여라
그렇다면, 사람은 사랑하길 원할까, 받기를 원할까. 서 교수는 후자라고 얘기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사랑을 받으려 할 것이다. 사랑하기는 받는 것보다 지치기 때문”이란다.
과연 사랑을 받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중요한 건 상대방의 뇌를 속여야 한다. 여기에서 모든 게 출발한다.
“사랑을 받기 위해 뇌를 속여야 한다”며 서 교수는 철학자를 중심으로 언급하면서 네 가지 방법을 얘기했다.
#철학자들은 이렇게 속였다
첫번째는 사기(詐欺)다. 말 그대로 속이는 것이다.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를 예로 들었다.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는 말을 남겼다. 현재의 터키땅에서 태어난 그는 이집트와 페르시아 등을 유랑하면서 나름대로 터득한 '탈레스 법칙'으로 합법적인 사기를 치며 상당한 재력가로 훗날을 보냈다.
두번째는 남을 잘 사귈 줄 알아야 한다. 이번엔 피타고라스다. 그의 부친은 부유한 보석상이었다. 가업승계를 거부한 피타고라스는 보석을 훔쳐 떠돌며 학파를 만들었다. 피타고라스학파다. 피타고라스는 공동생활, 즉 '남과 더불어'를 통해 학파를 역사의 기록에 선명히 남겼다.
세번째는 허풍이다. 시칠리아섬 출신의 그리스 철학자인 엠페도클레스는 허풍이 심했지만,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선 실천했다. 그가 화산 분화구에 몸을 던진 것도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신이라는 점을 확신시키기 위해서다.
네번째 주인공은 프로타고라스다. 그리스 철학자이자 소피스트의 제 일인자다. 소피스트는 수사학과 변론, 웅변을 가르치는, 말 그대로 입으로 먹고 사는 이들이다. 사랑받기 위해선 말을 잘해야 한다는 얘기다.
#물질보다 감(感)을 찾자
여기에 한 가지가 더 있다. 바로 감(感)이다. 서 교수는 “사랑은 감으로 해야 한다. 우리나라 사람은 감이 뛰어나다. 여자가 남자보다 감이 더 발달돼있다. 남자는 그 감을 잘 어루만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랑할 때 물질을 주고받고 하지 말란다. 사랑이라는 감정의 유통기한은 3년이다. 물질보다는 3년에 한번씩 '감'을 찾으려 노력하면 사랑은 다시 찾아온단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단어 실체가 있을까. 서 교수는 “실체는 없다. 다만, 우리가 있는 것처럼 만들뿐”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물질로 사랑을 표현한다. 물질만큼 사랑한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소크라테스가 내린 사랑의 정의를 인용했다.
서 교수는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원하고, 그것을 찾아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것, 즉 대상이 무엇이든 알고 싶은 것”이라고 말했다.
사랑하는 이들끼리 왜 싸울까. 서 교수는 “자존심과 고집이 아니라 자기의 벽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결국 사랑이란 아름다움 자체를 원하고 간직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본성은 이것을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뿐이다.
서 교수는 “소크라테스가 모든 사람들이 에로스의 위력과 용기를 찬미하고 귀하게 생각해 주기를 바랐던 것도 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알고 싶다. 정말 알고 싶다. 지식에 대한 열정, 상대에 대한 열정…. 이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앎에 대한 열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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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명 교수 |
'잠재력', '대전'이라는 도시를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다.
대전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대전의 미래를 개척하기 위한 원동력이 바로 잠재력이라 할 수 있다. 대전의 재발견 첫 강사로 나선 김태명 한남대 도시부동산학과 교수이자 대전학연구회장도 여기에 주목한다.
김 교수와 함께 대전발전의 100년 역사를 돌아보고, 함께 대전발전의 미래상을 상상해보자.
#대전의 탄생
구석기 시대, 대전의 선조가 소제동, 유성, 유천, 산내를 중심으로 정착했다.
백제 때에는 우술군, 신라 때 비풍군, 고려 때 회덕현ㆍ유성현ㆍ진잠현에 속한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공주목하의 회덕현ㆍ진잠현에 속했다가 고종 32년(1895년)에 지방행정제도의 개편으로 회덕군ㆍ진잠군 지역이 됐다.
일제의 강점기인 1914년 3월 1일 회덕군ㆍ진잠군과 공주군의 일부가 합쳐져 대전군이 신설됐다.
대전은 경부선이 개통되기 전인 1904년까지만 해도 시골마을이었다. 대전이 세상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때는 1905년 경부선 철도 개통과 함께다.
#잠재력, 꾸준히 쌓아오다
김 교수는 대전발전의 원동력을 인구에서 찾았다.
탄생한 초기인 1926년 인구는 1만4930명이었다. 읍으로 승격되기 직전인 1930년 2만1696명, 읍이 부로 승격된 1935년 3만9061명, 1944년 7만6675명 등 일제 강점기 동안 연평균 9.6% 성장했다.
대전시로 승격됐던 1949년 12만6704명에 달했다.
6ㆍ25를 겪으면서도 경부ㆍ호남고속도로 개통, 대덕연구단지와 대전지방공단 조성 등으로 인구는 연평균 5.8%의 성장을 기록하면서 1979년 61만2613명에 달했다.
공업화와 도시화, 대전을 둘러싼 각종 개발 사업은 대전의 인구는 1988년 93만7119명에 이르렀고, 1989년 대전시가 직할시로 승격하고, 충남 대덕군이 대전시로 편입하면서 인구가 105만1795명으로 늘어 전국 5대 도시로 성장했다.
직할시 승격 후 10년 동안 매년 평균 3만1649명씩 늘었다. 엑스포 개최와 둔산 신도시 개발, 정부대전청사 이전 등 인구유입 요인이 많았기 때문이다.
2000년 139만510명이던 인구는 2011년 현재 152만명을 넘어섰다.
이 기간에 노은지구 등 각종 개발사업과 KTX 고속철도 개통 등 사통팔달 확충 등은 계속됐다.
김 교수는 “세종시를 비롯한 국제과학비즈니스 벨트 등 대전시가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할 수 있는 중요한 동력이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대전의 잠재력에 주목한다. 아직도 보여줄 게 많다는 것이다. 교육, 연구, 행정, 교통 분야로 특화된 대전은 서비스 산업이 87%를 차지하고, 2009년 현재 19개 대학교에 학생 수는 15만 명에 달한다.
우리나라 과학의 메카인 대덕특구에는 80개가 넘는 연구기관이 있고, 종사인력만도 5만명을 눈앞에 두고 있다.
특히 국토의 중심에서 교육, 연구, 행정,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대전은 국방의 중심지인 계룡시와 신중도시대(新中都時代)를 이끌 세종시, 국제과학비즈니스 벨트와 더불어 서울과 수도권의 기능을 분담하는 국토균형발전의 중핵도시다.
김 교수는 “1914년 대전군이 신설된 후 100년을 앞둔 시기, 대전역사를 재조명해야 하고 역량을 쌓아온 만큼, 이제부턴 숨겨진 잠재력을 발휘할 때”라고 말했다.
윤희진 기자 heeji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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