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신한 한남대 철학과 교수 |
사람들의 삶은 애당초 다양한 활동과 변화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감정이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것과 같다. 바라는 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해서 잘못된 삶은 결코 아니다. 삶의 만족과 행복은 이런 평범한 진리를 알고 현재에 만족할 때 달성된다.
'살아남기'나 '생존'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삶의 절박성을 나타낸다. 한계상황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삶을 가리킨다. 실존철학자들은 한계상황의 사례로 죽음을 들었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으며, 죽음에 직면해 있음을 의식할 때 자신의 유한성을 가장 절실하게 느낀다. 그러나 삶의 의지는 죽음이라는 운명적 유한성까지 이겨내려고 한다. 이런 점에서 진정한 삶의 의지는 소극적인 살아남기를 넘어선다. 말기암 선고를 받은 사람은 살아남기 위해 온갖 방법의 치료에 자신을 내맡긴다. 그러나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선 사람들은 단순히 살아남으려고만 하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남아있는 시간을 진정으로 의미 있는 삶을 위해 결단한다. 여기서 인간 존재의 진정한 인간됨이 엿보인다. 살아남기의 상황을 가로지르는 것은 삶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새로운 결단이다.
구직난 속에서 일자리 구하기, 조직 속에서 살아남기, 명퇴당하지 않기 등은 경제적인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다. 경제적인 생존은 인간 삶의 마지노선이다. 아무리 고상한 정신이 있다 하더라도 이를 지지해줄 수 있는 경제적 삶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그 빛을 발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경제적 생존은 인간 삶을 지킬 수 있는 최후의 보루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그때마다 지혜로운 결단을 내려야 한다.
그런데 살아남기에도 품격이 있다.
무엇보다 살아남기의 화두를 정치적 요구와 지배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이럴 경우 삶은 애써 가꾸어온 품격을 상실할 수 있다. 개인은 자신의 생존을 남에게 맡겨서는 안 되며 국가가 개인의 생존을 보장해야 한다고 일방적으로 요구해서도 안 된다. 삶은 애당초 개인의 선택에 의해 결정되며 결단을 통해 아주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도 시민의 삶을 일방적으로 재단하고 살아남기를 특정한 방향에서 강요해서는 안 된다. 시민의 삶은 국가정책의 특정 지표를 통해 온전히 파악될 수 없다. 시민의 삶에 대한 국가의 최소 개입이 최대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주장도 이런 점에서 충분한 정당성을 지닌다. 삶의 품격은 적극적인 삶의 의지에서 보다 높여질 수 있다. 의지의 적극성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분명한 목표와 이념에서 나온다. 반성없는 삶은 아직 생존의 기로에 놓인 삶이 아니라 하더라도 품격 있는 삶이 아니다. 분명한 목표 없는 임기응변식 살아남기는 삶의 현재적 품격마저 떨어뜨린다.
반면 철저한 현실인식과 목표설정을 통해 기획된 생존전략은 삶에 보다 높은 품격을 부여할 것이다. 삶의 품위와 멋스러움은 소극적 살아남기에서가 아니라 주어진 삶을 돌아보고 새롭게 결단하는 적극적 살아남기에서 나온다. 그래서 품격있는 삶은 늘 철학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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