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찬 대전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자크 아탈리의 호모 노마드 유목하는 인간에서 찾아낸 구절이다. 과거의 노마드들은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불, 사냥, 언어, 농경, 목축, 신발, 옷, 연장, 제식, 예술, 그림, 조각, 음악, 계산, 바퀴, 글씨, 법, 시장, 세라믹, 야금술, 승마, 배, 신, 민주주의 등을 고안했다. 문명의 실마리가 노마드들의 손과 머리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에 반해 정착민들이 만들어낸 것이라고는 고작 국가, 세금, 감옥 등 옥죄는 것들뿐이었다.
기원전 3000년 경 북중국과 헝가리 사이의 스텝 초원과 사막에는 기마인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여러 이름으로 불리던 이 종족들은 기마술(騎馬術)과 천신(天神)을 기반으로 한 이동성 융합문명에 불을 지폈다. 그들은 기원전 1500년 무렵 알타이족, 인도유럽어족 등 두 개의 주요 집단으로 분리되었다. 자크 아탈리의 설명을 수용하면 '주몽신화'의 주인공인 우리의 주몽 일파도 알타이족의 한 부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형적인 노마드인 것이다. 한국신화가 보여주듯 북부여, 동부여, 졸본부여로 이어지는 주몽의 행로는 우리가 조상이라고 인정하는 북방의 기마인들이 이동한 행로와 정확하게 겹친다. 거기에 백제신화까지 하나로 연결하면 한반도 선주민들이 그려낸 노마드의 궤적이 그대로 나타난다.
농경 및 정주의 삶이 지배한 과거 5000년은 500만 년을 이어온 인류사의 흐름에 비춰 보면 잠깐 거쳐가는 오아시스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다시 찾아온 새로운 노마드의 시대는 새로울 것도 없고 이질적일 것도 없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따름이다. 이렇게 이 문명론자는 주장하고 있다. 인류가 노마드일 때 실로 많은 것들이 만들어졌으니 이규보의 '동명왕편'에도 주몽이 오곡의 종자를 품고 내려오는 것으로 나오고 있다.
거듭 말하건대 신 노마드의 시대가 열렸다. IT혁명을 거치면서 인류 역사는 다시금 노마디즘이 주류로 부상하고 있는 중이다. 5억 명 이상이 일 또는 정치적 사유로 인한 노마드 즉 이민자, 망명객, 해외체류자, 노숙자, 이주노동자들이고, 한 해 10억 명 이상이 자의든 타의든 여행을 한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노마드들이 도시에서 서식을 하고 있다. 거리거리마다 하루 온 종일 사람들로 넘쳐나는 것이다. 사람들의 부류를 둘로 가르면 하나는 토박이이고 하나는 떠돌이가 된다. 그런데 떠돌이 중에는 원래 있던 익숙한 떠돌이가 있는가 하면 전혀 새로운 이질적인 떠돌이도 있다.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녀야만 삶을 지탱할 수 있는 떠돌이, 이들은 어쩔 수 없이 노마드가 된 인프라 노마드다. 자신만의 능력을 독점적인 브랜드로 삼아 이곳저곳을 날아다니는 떠돌이, 이들은 디지털시대의 첨병 하이퍼 노마드다. 같은 떠돌이지만 둘 사이에는 천양(天壤)의 차이가 있다.
김기덕 감독이 베니스 영화제에서 최고의 영예를 차지했다는 소식이다. 수상식장에서 전통복장을 입고 민요 '아리랑'을 불러 화제가 되고 있다. 스스로를 일컬어 “열등감을 먹고 자란 괴물”이라고 한 김 감독은 중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라고 한다. 전자공장과 자동차 정비업소에서 일을 배우다가 쫓기듯 해병대에 자원입대를 했다고 하니 전형적인 인프라 노마드로 삶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훌쩍 아무 마련도 없이 프랑스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로부터 2년에 걸친 프랑스에서의 경험과 충격은 그로 하여금 영화에 눈을 뜨게 만들었다. 그리고 20년이 경과한 오늘 그는 영화 하나로 세계를 움켜쥔 인물이 되었다. 한 곳에 멈추지 않은 이력이 그와 같은 결과를 만들어냈으니 그는 이제 하이퍼 노마드가 된 것이다. 지금은 스몰월드(small-world)의 세상이다. 젊은이들이여, 기회가 되면 기회를 잡아 세상 밖으로 나갈 일이다. 김 감독을 영화와 만나게 해준 것도, 그리고 그를 세계적인 인물로 키운 것도 프랑스 행 비행기 티켓이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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