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충식 논설실장 |
개인적으로 강풀의 웹툰 원작 '이웃사람'을 찾아 읽던 2008년 당시에는 202호에 살고 있었다. 죽은 소녀의 집과 호수(戶數)가 동일했다. 302호의 악질 사채업자나 102호의 잔인한 살인마는 살지 않았다. 인사는 기본이고 호박죽을 쑤어도 나눠 먹었다. 몰래 뻐끔담배를 피우던 203호 딸은 이웃과 마주치면 후다닥 담뱃불을 감추고 인사하곤 했다. 층간소음은 대충 신경썼고, 극악범죄는 상상 밖이었다. 뭉뚱그려 '이웃'이란 말의 효용과 가치가 통한 이웃들로 기억된다.
현실에 투영된 이웃은 아주 대조적으로 살벌하다. '이웃사람' 감상평도 이웃의 의미를 되새기거나 기피하거나의 두 갈래다. 며칠 전 통계로 아동 성폭행범의 경우, 4명 중 1명(23.4%)은 이웃사람이나 친족 등 면식범이었다. 우리 이웃과 코드의 생성과 진화방식이 확 달라 보이는 조두순 사건, 혜진·예슬양 사건의 가해자도 이웃이다. 꼭 그래서는 아니지만, 아파트는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닮아가기 시작했다. 멀리 떨어진 섬, 배를 타고 정해진 입구에 도달하고 감시망루가 설치된 오리지널 유토피아처럼 아파트는 입구부터 출입카드를 쓰고 경비초소가 있는 섬이 됐다.
그렇다고 현실이 유토피아('어디에도 없는 곳'의 뜻)는 아니다. 비교하자면 전쟁을 피해 성안에 만들었던 로마시대 롱하우스 집합주택보다 안전하지 않다. 이웃간 범죄 빈발이 '공동체 해체' 탓이라는 전문가는 그 깔맞춤 답안으로 '공동체 복원'을 내놓는다. 인사도 그 대안이다. 지방자치단체에서 좋은 문화 정착 사업에 '이웃과 인사하기'를 포함한 거야 전혀 꼬투리 잡을 사안이 아니다. 인간성 긍정의 에너지로서 효용은 물론, 어긋난 1차원적인 이기심을 부수고 서먹한 공유지식을 나누는 영화의 202호 주변처럼 집단적 불가지성을 여는 열쇠가 될 수도 있겠다.
반면, 관점과 방법을 혼동한 발상으로 떨어질 우려는 있다. 대전만 해도 공동주택이 70%에 달하면서 라이프스타일이 상당히 바뀌고 있다. 자율실천도 타율실천도 어렵다. 환경분쟁 해결을 위해 '이웃사이 상담센터'가 수도권에 이어 대전 등지에 곧 생겨도 이웃간 거리까지 좁히긴 힘들다고 본다. 민선 4기 때도 인사하기는 '행복한 아파트 사업' 등의 단골 메뉴였는데, 목적의식적 계몽주의나 결과적 계몽주의로 흐르는 한계를 드러냈다.
좀 다른 각도에서, 나의 개띠 룸메이트였던 KBS 구중회 PD는 그의 연출작에서 초고층 아파트가 대안이 아닌 미래의 재앙이 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경제·환경적 측면을 넘어 콘크리트 더미 그 이상을 복원하지 못할 때도 재앙이 된다는 것은 내 진단이다. 최고 권위의 '대한민국 아파트'나 지자체 선정 '공동주택 우수관리단지'의 영예는 '이웃간 매너'라는 옷을 입은 아파트에 주어져야 한다. 아동 성폭력 장소로 피의자나 피해자의 집 주변이 40%를 넘는다는 '바이러스 마케팅' 같은 소식에 이런 소박한 생각을 잠시 해보게 된다.
반드시 '인사하기'만은 아니다. 어떤 문화를 막론하고 생물학적 체계와 연결된 문화적 체계가 있다. 이 관계망이 무시된 '무작정 ○○하기'는 곧 걸림돌에 직면한다. 전문가들은 “집 주변이 안전하다는 인식이 더 위험하다”며 도끼로 장작 패듯 직설로 일깨워준다. 광기와 비상함이 가득한 공동체의 복원에 작은 디딤돌은 되겠구나 싶다가도 인사할 염이 싹 스러져 한순간 급브레이크를 밟고 만다. 범죄는 '당신' 아닌 '나'의 이야기가 됐다.
어쩌면 인사보다 먼저 착한 이웃과 나쁜 이웃 식별법이 필요할지 모를 위태로운 세태 속의 '인사하기'는 영화 '이웃사람'이 거둔 의외의 성과를 따라잡기 힘들 것 같다. 옛 신문을 들춰보다 운 좋게 동아일보 29년 전 바로 오늘, 1983년 9월 12일(!) 7면 “인사하며 삽시다”라는 기사를 찾아냈다. 모 단체에서 '인사하기 5개년 캠페인'으로 아파트에 홍보물을 붙인다는 내용까지 훑어보고는 '3허'씨(허전해, 허무해, 허망해)에 사로잡힌다. 바른 생활을 강조하는 단체에서 아파트 좋은 문화 정착 홍보물을 붙인다는 오늘 기사를 본 게 조금 전이다. 두 얼굴의 이웃, 이웃 문제의 해답은 영원히 이웃사람인 듯하다.
최충식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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