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오류동 중도일보 사옥 바로 옆에서 칼국수집을 운영하는 장우각(60)씨는 중도일보와 참으로 별난(?) 인연을 간직하고 있다.
어느덧 환갑을 맞은 그가 간직한 중도일보와의 첫 인연은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릴적 그의 집 앞에는 신문사 하나가 자리잡고 있었다. 지금의 교보빌딩 자리인 선화동 사옥에 둥지를 틀고 있던 중도일보였다.
학창 시절 장씨에게는 이 신문사에서 매일 같이 윤전기가 돌아가며 신문을 찍어내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이 하나의 일상이자 소일거리였다.
“당시에는 윤전기에서 나오는 신문을 사람이 일일히 손으로 접어야 했죠. 학교 끝나고 가서 구경하다 신문 접는 일을 도와 주고는 했는데, 거기 계시던 분이 신문 한번 돌려보지 않겠냐고 하더군요. 집안 형편이 넉넉치 않았던 터라 그러겠다고 했죠.”
그렇게 시작된 장씨와 중도일보의 인연은 한동안 지속됐다. 중학교에 다니는 동안 2년 넘게 신문배달 일을 했고, 당시 한달에 150원~200원 정도 되는 돈을 받아 집안 살림에 보태곤 했다.
장씨는 당시에 대해 “막 신문이 나오면 새끼로 어깨띠를 만들어 들쳐 매고 뛰어다니면서 ‘신문이요~’를 외치며 배달했다”며 “비오는 날이면 지금 처럼 비닐로 싸서 배달하던 상황이 아니라 신문이 비에 젖지 않을까 노심초사 했던 기억이 난다”고 회고했다.
당시는 신문의 질이나 인쇄 환경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게 열악한 시절이었다.
그는 “그때는 신문을 인쇄하려면 납으로 된 활자를 하나하나 핀셋으로 뽑아 맞춰 글자를 찍어내야 했다”며 “종이 질도 지금 같지 않고 신문이 서너 장에 불과했는데, 가끔 활자가 밀리는 경우가 있어 윤전실에는 항상 긴장감이 묻어났다”고 당시 기억을 떠올렸다.
배달 일을 그만 둔 후에도 장씨는 신문사에서 잔심부름 같은 것들을 하며 한동안 중도일보와 인연을 이어갔다.
“그땐 신문사에도 급사가 있었는데, 한 동안은 급사일을 하며 이것저것 잔심부름도 했어요. 그러고 보면 중도일보와 연을 맺은게 꽤 적지 않은 시간이었죠.”
하지만 장씨의 기억 속에서 중도일보는 오래가지 못했다. 1972년 선화동에서 대흥동 경암빌딩으로 자리를 옮긴 중도일보는 강제 폐간되며 역사 속에서 한 동안 사라졌기 때문이다.
뗄레야 뗄 수 없는 인연이었을까. 그로부터 30년 세월을 훌쩍 넘긴 어느날 칼국수집 사장이 된 장씨는 먼 기억으로 남아 있던 중도일보와의 인연을 떠올렸다.
식당을 차린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옆으로 중도일보가 사옥을 이전해 온 것.
어릴 적에는 그의 집 바로 앞에 있던 그 신문사가 수십년 세월을 건너 그의 식당 바로 옆에 자리를 잡았으니 기묘하다면 기묘한 인연이다.
그는 이런 인연 탓에 지금도 애독자로서 중도일보에 대한 애정을 과시한다.
장씨는 “지금도 중도일보를 매일 보고 있는데 단지 가게 앞에 회사가 있어서가 아니라 어릴적 기억과 인연 때문”이라며 “엊그제 일 같은데 벌써 61주년을 맞았다니 감회가 새롭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중도일보가 언제나 치우침 없이 지역 발전을 위해 좋은 기사를 많이 써줘서 사랑받는 지역신문으로 영원히 지속됐으면 좋겠다”며 “언론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 중도일보가 항상 충청인을 대표하는 신문으로서 지역민의 아픈 곳,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역할을 해달라”고 바람을 피력했다.
이종섭 기자 nom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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