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진한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 |
그렇지만 복지를 한번 생각해보자. 보편적 복지의 확대는 대부분 국민들의 복지를 향상시킨다는 목표를 갖지만 무시할 수 없는 두 가지 부수효과들을 반드시 동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나는 기업이든 근로자든 생산참여자들로부터 세금을 더 많이 걷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복지수혜자들의 생산유인 또는 근로유인을 감소시킬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기업세금의 강화는 기업의 생산활동이나 투자를 위축시킬 우려를 높이고 개인소득세나 복지혜택의 강화는 근로유인을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는 모두 일자리 창출 면에서도 불리한 환경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복지는 결국 생산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고 따라서 복지제도 관련 설계는 반드시 생산에 대한 배려와 함께 세심하게 마련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것이 복지확대 등에 관련되는 논의와 논쟁이 항상 간단하지 않은 이유다.
정의의 개념 역시 간단하지 않다. 논자에 따라 정의의 개념은 서로 매우 다르다. 일찍이 벤덤이라는 학자는 공리주의적 정의론을 제창했고 노직이라는 학자는 사유재산권은 신성하기 때문에 자유방임된 시장을 전적으로 믿자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롤스처럼 분배적 정의를 일종의 사회계약으로 구성하자는 사람도 있었고 최근 샌델이라는 학자는 여기에 더하여 공동체주의적 정의의 측면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는 이 정의의 개념에서도 전체국민의 총만족감, 기여와 자격, 시장과 자유, 공동체와 평등 등 어느 가치도 혼자 절대적이지 못하며 현실에서는 이들이 서로 상호보완적으로 위치 지워져야 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효율적인 생산활동에 긍정적인 인센티브를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정의에 대한 논의 역시 간단하지 않은 이유다. 경제 내에서 보다 생산적인 부문에 종사하면서 노력과 기여를 제공하는 경제주체들이 보다 높은 보수를 얻고 점차 높이 계층상승해 갈 수 있다면 그 경제는 생산활동을 경쟁적으로 유인해낼 수 있게 됨으로써 보다 생산적으로 발전해 가리라고 추론할 수 있다. 생산에 긍정적인 유인을 줄 수 없는 정의론은 당연히 지속가능하지 못할 것이다. 정의든 복지든 누가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생산하느냐에 긍정적인 유인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소는 누가 키우나?'라고 했던 어느 코미디언의 유행어처럼 정말 '생산은 누가 하나?'다.
경제민주화 논의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아무리 멋지고 포괄적인 정의의 개념도 제대로 실천되지 않으면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현재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키면서 진행되고 있는 공천비리에 대한 조사와 공방, 재벌개혁과 대기업-중소기업 동반성장에 관한 논의, 사내하도급 근로자들의 정규직화, 각종 부정부패 등과 같은 심각한 문제들도 기실 현실에서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구체적인 정의의 규범으로 존재하는 기존의 법규들을 위반했거나 지키지 않아서 발생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사회의 경제민주화도 이제 이러한 공동규칙들을 철저하게 준수하는 일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진국 사회들을 살펴볼 때 법규와 규칙의 준수는 골머리 아픈 진보와 보수의 논쟁, 그리고 복지와 정의에 관한 논쟁 이전에 사회존립의 기본전제들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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