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시는 3ㆍ10만세운동을 기억하고 있다. 1919년 3ㆍ1 독립만세운동이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에 파급되면서, 3ㆍ1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내려온 면천보통학교 4학년생 원용은이 주축이 돼 동급생 박창신, 급장 이종원과 함께 밀의해 3월 10일 면천보통학교 학생들과 벌인 3ㆍ10만세운동이 당진시의 최초 독립만세운동이다.
이로 인해 16세 원용은과 18세 박창신 두 학생은 공주형무소에서 4개월간 옥고를 치르다 석방되고 면천보통학교에서 퇴학당하게 되지만, 이는 당진에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는 시발점이 됐다.
또, 4월 4일에는 대호지면 광장에서 이인정, 송재만, 남주원 등이 중심이 돼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됐는데, 파고다공원에서 벌어진 3ㆍ1운동에 참여하고 돌아온 남주원, 이두하, 남상직, 남상락 등이 독립추진위원회를 조직하고 천의장날에 결행하기로 한 것이다.
4월 4일 대호지면 광장에는 9시를 기해 약속대로 600여 명이 참석해 30자 높이의 대나무에 태극기를 계양하고, 대호지면 이인정 면장의 연설에 이어 남주원의 독립선언문 낭독, 이대하의 애국가 제창, 행동총책 송재만 선창의 선서와 함께 만세 시위를 시작해 정미면 천의시장으로 이어졌다.
3ㆍ1운동은 민족의 독립을 달성하는 데는 실패했으나 독립의 자신감과 함께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되는데, 바로 농촌계몽운동인 브나로드(v narod)운동이다.
당진=이종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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