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찬 대전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긴 장성 한 쪽으로 넘실넘실 물 흐르고(長城一面溶溶水), 너른 들 동쪽머리 점점이 산들이네(大野東頭點點山).” 앞 두 구절은 일필휘지로 써내려갔다. 그런데 이어지는 두 구절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읊조리고 또 읊조리고 쓰고 또 쓰기를 여러 차례, 급기야 시상이 말라버려 붓을 던지며 통곡을 하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그리하여 이 시는 두 구절만으로 널리 세상에 전해지게 됐다.
옛사람들은 이처럼 시 한 편을 완성하기 위해 온갖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 구절 하나 심지어는 글자 하나를 얻기까지 침식을 잊는 일이 허다했다. 3년이 되어서야 겨우 한 구절을 얻고는 눈물을 흘렸다는 가랑선의 일화를 같은 '동인시화'에서 찾을 수 있다. 용케 시 한 구절을 얻었지만 성에 차지 않아 붓방아만 찧다가 결국 시고를 불사르고 말았다는 이규보 같은 사람도 있다.
이처럼 마음에 드는 한 구절은 쉽게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피를 말리는 구상과 거듭되는 실패, 무엇보다도 세상을 뒤흔드는 귀신같은 아이디어가 있어야 한다. 대중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딱 한 줄을 쓰기 위해서 글자와 씨름하는 사람들이 있다. 시인은 독자들이 있어 씨름을 하고 카피라이터는 구매자들이 있어 씨름을 한다. 그런 글 한 줄을 우리는 파워라인(Power Line)이라고 부른다.
1952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와 민주당의 애들레이 스티븐슨이 격돌했다. 그때 아이젠하워의 선거 슬로건은 “나는 아이크를 좋아해(I Like Ike)”였다. '아이크'는 그의 애칭이다. 반면에 스티븐슨의 슬로건은 “스티븐슨, 경험 많은 후보자(Stevenson, The Experienced Candidate)”였다. 생각해보라. 두 슬로건 중 어느 것이 파워 라인이 되겠는가? 물어볼 것도 없이 선거는 아이젠하워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윈스턴 처칠이 옥스퍼드 대학 졸업식에서 축사를 할 때다. 처칠이 천천히 연단에 올라가자 모든 사람들이 주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처칠이 입을 열었다. “포기하지 마라(Never Give up).” 목소리가 낮아 말이 들리지 않았다. 처칠이 다시 입을 열었다. “포기하지 마라(Never Give up).”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Never Never Give up).” 그 순간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2002, 2003년 무렵 아주 인상적인 CF 두 개가 대한민국 국민들의 심금을 흔들었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정준호와 장진영이 하루 일을 마친 뒤 차를 타고 함께 떠나는 장면의 현대카드 CF다. 또 하나는, “여러분, 모두 부자 되세요!” 김정은이 하얀 눈밭에서 빨간 장갑을 입가에 대고 외친 BC카드 CF다. IMF 터널을 막 뚫고 나온 아직은 쓸쓸한 국민들의 마음속으로 깊숙이 파고든 파워 라인들이다.
“마시자, 코카콜라(Drink, Coca-Cola)”라는 코카콜라와 “저스트 두 잇(Just Do It)”이라는 나이키의 슬로건 등은 우리들 귀에도 낯설지 않다. “아이 러브 뉴욕(I Love New York)” 같은 도시 슬로건이나, “말레이시아, 진정한 아시아(Malaysia, Truly Asia)” 같은 국가 슬로건도 좋다. 이처럼 파워 라인은 듣기도 좋고 보기도 좋아야 한다. 게다가, 마음을 끄는 이야기가 담겨 있으면 더욱 더 강력한 파워를 발휘할 수 있다.
12월 대선을 앞두고 각 정당 후보자들 간에 슬로건 경쟁이 치열하다. 박근혜 후보가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라고 했다가 빈축을 샀다. 박 후보의 꿈이 아니냐는 것이다. 문재인 후보는 “대한민국 남자”라고 했다가 어물쩍 거둬들였다. 총 유권자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자들을 깜박하고 만 것이다. 첫 번째 라운드는 그럭저럭 손학규 후보의 “저녁이 있는 삶”이 장원을 차지하는 것 같다.
그러다가 다시 “박근혜가 바꾸네”와 “사람이 먼저다”가 등장했다. 꼬집는 것도 부질없는 일이나 “박근혜가 바뀌네”는 어떨까? 또 하나는 지극히 평범하여 코멘트할 것도 없다. 그나저나 안철수 교수는 준비를 하고 계시는지. 계속 '안철수의 생각'으로만 끌고 갈 작정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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